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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만난 김일성 "붉은 기는 과연 얼마나 더 나부낄까"

중앙일보 2016.08.24 11:01
꼭 24년 전인 1992년 8월 24일.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6·25 전쟁이라는 과거사를 덮고, 대만과의 단교라는 아픔을 무릅쓴 결정이었다. 한국은 중국 너머로 한반도 통일과 21세기 경제부흥을 바라봤고, 중국 역시 한국 너머로 아편 전쟁 이후 150년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와 부흥하는 중국을 그렸다. 그야말로 ‘윈.윈’ 전략. 한·중 수교는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 도미노가 한창이던 1990년, 대(對) 소련 수교에 이은 ‘노태우 북방정책’의 결정탄이었다.

중국은 지금 인구 13억5600만, GDP 11조3800억 달러(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G2의 힘을 구가하고 있고, 한국도 국제무대에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헌데, 2016년 여름의 한·중 관계는 근래 최악의 상황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THAAD)체계의 한반도 배치와 관련한 중국의 태도로 반중(反中) 내지는 '중국 다시 보기' 분위기도 생겨나고 있다.

2010년 11월 한소 수교 20년을 맞아 중앙선데이에 게재한 '북방정책 재발견' 기획 기사를 꺼내 다시 소개하는 이유다. 국제질서 대변혁의 시기에 선제적으로 대담하게 펼친 한·소 및 한·중 수교 과정이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과의 관계는 물론, 불확실성에 빠진 남북관계 해결에 전략적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함께.

1990년 9월 30일 한·소 수교가 마무리된 뒤, 노태우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다음 타깃인 한·중 수교에 집중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라마틱한 한·소 정상회담을 거쳐 수교에 성공한 한국 정부는 자신감이 생겼고, 이를 지켜본 중국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김종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91년 4월 제주도에서 고르바초프와 노태우 대통령이 나란히 산책하는 장면은 중국 지도부를 자극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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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왼쪽)이 92년 9월 30일 중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떠나기 앞서 양상쿤 국가주석을 만나 방중 기념 사진첩을 보고 있다. 이틀 전 두 사람은 인민대회당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한·중 정상회담을 했다. 양 주석 뒤 통역하는 사람은 리빈 전 주한 중국대사. [중앙포토]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97년 사망)은 한·중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85년 4월 “중·한 관계 발전이 중국 입장에서 필요하다. 우선 장사 때문이다. 다음은 대만과의 관계 때문이다”고 밝힌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과 관계 개선을 얘기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은 한·중 양국의 사람과 물자 교류의 폭을 계속 넓히는 계기가 됐다. 79년 1900만 달러였던 교역 규모는 88년 31억 달러, 92년엔 64억 달러에 이르렀다. 중국에는 삼성·선경·금성 같은 회사들이 진출해 있었다.

이병기 당시 청와대 의전수석의 증언. “90년 4월 어느 날. 선경(현 SK) 최종현 회장(98년 작고)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베이징 지사의 이순석 사장이 톈지윈(田紀雲) 중국 경제담당 부총리의 메시지를 갖고 왔다는 것이다. 이 사장이 전한 메시지 핵심은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단계적인 절차’, 즉 무역대표부 제안이었다.” 90년 10월 중국 국제상회와 우리 KOTRA 사이에 무역대표부 설치에 관한 원칙적 합의를 이뤘고, 곧바로 양국 외교부는 91년 1월 대표부 설치에 공식 합의했다.

“당진서 닭 울면 산둥성에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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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왼쪽)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 팡페이위안(芳菲園)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역시 최고 권력자의 의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끼어야 속도가 붙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밀사 도브리닌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의 첸치천(錢其琛) 외교부장이 방한하면서 수교 작업은 변곡점을 맞게 된다.

91년 11월 12일. 첸치천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3차 장관급 회의가 열린 서울에 왔다. 6·25전쟁 이후 중국 외교장관의 첫 방한이었다. 11월 초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서울에 온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의 역할도 컸다. 김종인 경제수석은 “노 대통령이 슐츠 장관을 불러 중국 지도부에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일주일 지나 슐츠로부터 ‘첸 부장이 APEC 총회 때 답을 가져갈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첸치천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노 대통령과의 대화를 이렇게 적었다. “군인 출신인 노 대통령은 비교적 온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과의 수교 문제에선 단도직입적이었다.”

다음은 외교십기와 당시 배석한 참모들의 전언으로 구성한 대화 내용.

▶노 대통령=“한국과 중국은 유구한 교류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서해안 당진에서 닭이 울고 개가 짖으면 그 소리가 산둥반도에 들린다. 수십 년 동안 두 나라가 떨어져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 아니냐. 한반도의 평화 안정과 발전을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희망한다. 조속히 수교했으면 한다.”

▶첸치천=“한국과 중국은 유구한 교류의 역사가 있다. 현재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쌍방이 노력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자. 동시에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길 희망한다.”

▶노 대통령=“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져진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이해한다. 우리 역사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거점으로 한반도를 요구할 때 조선은 이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조선은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첸치천=“과거 일본 때문에 우리 모두 고난을 겪었다.”

▶노 대통령=“KAL기 폭파사건, 아웅산 테러가 있었다. 북한을 잘 설득해 평화 유지에 기여하기 바란다. 중국이 북한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도 중국과 남북한 모두에게 유리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양국은 이 대화를 수교 논의의 본격 시발로 보고 있다.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였다. 대만과의 단교를 전제로, 수교를 함으로써 대만에 충격을 주려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배경은 경제였다.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은 “그때 중국은 한국에서 뭐든 배우려 했다. 특히 포항제철(현 POSCO)은 중국 고위 인사, 경제 관료들이 가장 원하는 시찰 코스였다. 중국 경제발전 모델로 포철을 눈여겨봤다”고 말했다.

무대는 베이징으로 바뀐다. 92년 4월 13일. 첸치천이 아·태지역경제사회이사회(ESCAP) 제48차 연차총회에 참석한 이상옥 외무장관을 댜오위타이 국빈관으로 초청했다. 첸치천은 수교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한다. “차관급을 수석 대표로, 대사급을 부대표로 임명해 베이징과 서울에서 수교 논의를 시작하자.”

한국 외무부의 노창희 차관과 중국 외교부의 쉬둔신(徐敦信) 부부장이 본회담 대표, 권병현 대사와 장루이제(張瑞杰) 대사가 실무협상 대표로 정해졌다. 중국도 비밀 유지를 강조했다. 실무 협상에 참가한 신정승 당시 동북아2 과장(전 주중대사)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얘기했다.

“이상옥 장관이 부르더니 ‘총무과에 병가를 내라. 직원들에게도 아픈 시늉을 해라’고 했다. 그때부터 4개월간 직원들의 눈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노창희-권병현-김석우(당시 아주국장)-신정승 실무협상팀은 동빙고동 안가에 틀어박혀 수교 협상을 준비했다. 동네 주민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든다며 경찰서에 신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이징에선 노재현 주중 한국대표부 대표와 김하중 대표보(전 주중대사), 정상기 부참사관 등이 지원했다. 협상의 최대 이슈는 한국과 대만의 단교 문제였다. 중국 측은 하나의 중국 원칙 아래 대만과 단교, 대만 대사관 등 재산의 중국 귀속 인정 등을 요구했고 우리 측은 다른 나라들이 그랬듯이 결국 수용했다.”

우리에게 차관을 요청했던 소련과 달리 경제협력 문제는 아예 없었다고 한다. 92년 8월 24일 댜오위타이 국빈관 팡페이위안(芳菲園)에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외교부장이 한·중 수교에 정식 서명했고, 이 장면은 전 세계에 보도됐다.

북, 첸치천 비행기 공항 구석으로 안내

88 서울 올림픽을 기반으로 한 노태우의 북방외교가 진행되는 동안 평양의 김일성은 불안했다. 기대온 언덕이 붕괴되는 소리가 지진처럼 가슴을 울렸다. 90년 9월 중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한·소 수교를 통보하고 떠난 지 며칠 안 된 날. 김일성은 열차를 타고 중국 북동부의 선양으로 갔다. 장쩌민 당 총서기를 만났고 중국의 최고 실권자인 덩샤오핑도 비밀리에 만났다. 『두 개의 한국』(돈 오버도퍼)에 따르면 김일성은 한국과 소련의 수교 결정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중국 관리들은 김일성이 “붉은 기는 과연 얼마나 더 나부낄 수 있을까”라며 걱정했다고 한다.

▶덩샤오핑=“공산주의 전망은 아직 밝다. 중국은 개혁·개방을 하고 있다. 경제 개혁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이전에 수차례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중국식 개혁모델을 따를 것을 권고했다.)

▶김일성=“남한 정부를 승인하지 말아달라. 행여 그리 되더라도 최대한 시기를 늦춰주면 좋겠다.”

덩샤오핑은 김일성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선양에서의 만남 한 달 뒤, 중국은 한국과 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한 것이다.

91년은 남북한의 유엔 가입이 핵심 이슈였다. 북한은 ‘분단 고착화’란 논리로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한국의 가입을 지지하는 나라는 더욱 늘어만 갔고, 소련은 공개적으로 유엔 가입을 지지했다. 91년 5월 리펑 중국 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한국이 유엔 가입을 신청하면 중국은 더 이상 반대하기 힘들다. 한국이 단독 가입에 성공하면 북한은 이후 가입하려 해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 뒤 김일성은 유엔 동시 가입이란 대세를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91년 6월 17일. 첸치천 외교부장도 평양으로 날아갔다. 평양 순안공항에는 군악대 연주가 울려퍼졌고 꽃을 흔드는 주민들로 공항은 가득 찼다. 북·중 사이 고위급 인사 방문 때 이어져온 프로토콜이었다. 김영남 외교부장과 묘향산 별장에 머물던 김일성을 만났다. 유엔 가입이 핵심 이슈였다. 김일성은 “남북한의 유엔 가입 문제는 상황이 어떻건 반드시 한꺼번에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현홍주 당시 유엔주재 대사는 “당시 북한이 두려워한 것은 유엔 무대에서 국력 차이가 드러나는 것, 한국이 순조롭게 통과되고 북한은 좌절되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는 “중국 측이 유엔 결의 프로세스를 설명하며 안심시킨 것으로 안다”고 했다.

현 대사는 “유엔 동시 가입을 토대로 북방 외교에 힘을 실으라는 게 노 대통령이 내게 내린 임무였다”며 부임 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한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90년 9월 부시 대통령은 “세계의 모든 자격 있는 나라가 유엔 회원국이 돼야 한다. 대한민국이 그 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유엔 가입을 반대해온 박길연 북한 대사의 표정이 밝았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이 좋았다” 는 것이다. 현 대사는 이유를 물었다. 박 대사는 “미국이 처음으로 북한의 공식 명칭, DPRK로 불렀다. 대단한 거다”고 했다.

한국이 주도권 쥔 뒤 유엔 동시가입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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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9월 27~30일 중국 국빈 방문 중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

중국이 한국과 수교협상까지 하자 북한은 더 당황했다. 92년 4월 양상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이 김일성의 80세 생일 축하 행사를 명분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의 손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위임한 대북 메시지가 들려있었다. 김일성과 회담에서 전한 내용은 이랬다. “국제정세와 우리의 대외관계를 분석할 때 중국은 한국과의 수교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 사업은 예전과 같이 지지한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일성이 입을 열었다.“한반도의 현재 상황은 미묘하다. 중국이 중·한 관계와 북·미 관계를 조화시켜 처리해주기 바란다. 이 문제는 중국이 좀 더 깊이 생각해줄 것을 희망한다.”

한·중 수교 실무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92년 6~7월, 장쩌민 총서기와 양상쿤 주석은 첸치천을 다시 평양으로 보냈다. 민항기가 아닌 공군 전용기를 타고 갔다. 평양의 순안비행장 풍경은 달랐다. 매번 보았던 환영 인파는 없었다. 전용기는 공항의 한 구석으로 안내됐다. 마중 나온 사람은 김영남 외교부장 한 사람. 곧바로 헬기를 타고 김일성의 별장으로 향했다.

▶첸치천=“국제정세는 극히 불안정하다. 언제고 중대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기회를 잘 포착하고 유리한 국제 환경을 조성해 자기를 발전시키고 국력을 증강시켜야 한다. 최근 국제정세, 한반도의 정세 변화를 볼 때 우리는 중국과 한국이 수교 협상을 진행해야 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다.”

▶김일성=(깊이 생각하더니) “잘 들었다. 우리는 중국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평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이해한다. 중국과 우호관계 증진에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일체의 어려움을 극복해, 자주적으로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건설해 나갈 것이다. 덩샤오핑 동지에게 안부를 전해달라.”

김일성은 첸치천이 선물로 갖고 간 옥으로 만든 아홉 마리 용 조각품을 보고 또 봤다. 이날 만남은 김일성이 중국 대표단을 맞은 행사 중 가장 짧았다. 연회도 없었다. 점심만 서둘러 먹고 평양으로 돌아와 귀국했다. 2년 전 90년 9월 셰바르드나제가 아에로플로트 특별기를 타고 평양에 갔을 때 받은 대우에 비하면 환대에 가까웠다.

김종휘 수석은 “우리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나가니까 북한은 남북 대화에도 나오고 유엔 가입도 하게 된 것”이라며 “90년 9월 연형묵 총리가 왔을 때 분명히 못을 박고 대화를 이끌어갔다”고 했다. 그는 연 총리에게 한 얘기를 소개했다. “주한미군 얘기하지 마라. 콘크리트 장벽 얘기하지 마라. 방어적 성격이다. 당신들도 서울로 내려오지 않았느냐. 국가보안법 얘기하지 마라. 우린 북한 당규약 간섭 안 한다. 유엔 가입한다. 분단 고착화라고 하는데, 통일된 동·서독도 유엔에서 각각 표를 갖고 있었다. 가입하지 않으면 북한은 더 소외된다.”

김종인 경제수석은 “한·중 수교 때도 ‘왜 그렇게 서두르냐’ ‘대만과의 의리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국가이익을 위한 선택의 문제였다면서 한·중 수교로 13억 시장을 개척하지 않았더라면 90년대 말 금융위기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중 수교 당시 무역 규모는 92년 64억 달러였다. 2008년엔 1700억 달러, 지난해 3000억달러로 계속 증가했다. 한국의 교역 규모 1순위가 대중국 무역이다. 인적 교류도 92년 13만 명에서 2009년 454만 명, 지난해 1000만 명을 넘었다. 저개발국가로 원조를 받던 중국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이른바 G2국가로 자리매김했다.

김수정 국제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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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 외교이야기(外交十記) 』『두개의 한국 -The Two Koreas』『제6공화국 실록』『대사관,순간의 기록』『노태우 육성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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