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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취향 있는 어른이 필요해

중앙일보 2016.08.19 00:38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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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친구가 SOS를 보냈다. “흰 셔츠가 거기서 거기지. 왜 그 돈을 주고 사?”라는 자기 부장의 ‘거기서 거기론’ 때문이다. 옷이나 머리 스타일을 건드리는 것까진 괜찮았단다. 문제는 일에까지 손을 뻗쳤단 거다. 10년 전 유행하던 스타일의 디자인 업체와 계약하려는 부장의 구식 취향에 공들인 프로젝트를 망치게 생겼다며 한숨이었다.

청와대의 밥상도 호화스러움보단 그 몰취향이 뜨악했다. 송로버섯, 캐비아, 바닷가재, 샥스핀…. 고급 음식에 1차원적으로 연상되는 재료들만 억지로 쑤셔 넣은 것 같아서다. 고급 재료로 만들어도 창의적 주제 없인 좋은 음식이 될 수 없다. “나 샥스핀도 캐비아도 먹었어”라는 자랑 말고는 연상되는 게 없는 무취향의 메뉴다. 분명 청와대의 상에 오르기엔 격이 떨어졌다.

‘금동이의 좋은 술은 100명의 피’ 운운하는 비판자들의 논리도 시대착오적이다. 도시락 바닥의 쌀밥까지 적발해내며 배를 곯던 시대가 아니다. 서민 음식 먹는다고 정치인의 삶이 서민의 삶일 수도 없다. 2016년이면 국밥 먹방에 점수를 주는 것도 끝낼 때가 됐다.

그럼에도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의 사치품 논란과 전통시장 유세는 빠지질 않는다. 에르메스 명품 타이, 600만원대 고가 의자는 정책보다 더 큰 논란이 됐다. 논란의 당사자들은 “선물이다” “중고로 샀다”는 궁색한 변명을 해야 했다. 내가 좋아서 샀다고 용기 내 말한 이들은 없었다.

조금 사치스러우면 어떤가. 지금 젊은이들에겐 취향이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비용만 강조한 탓에 똑같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 효율만 내세우다 보니 최단 거리로 연결된 직선형 다리로 가득 찬 도시를 넘겨받았다. 이제는 다른 선진국처럼 뭔가 여유와 멋, 취향을 가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돈 쓰는 게 문제가 아닌 시대가 됐다.

영국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호피무늬 구두와 가죽 부츠를 즐겨 신는 테리사 메이 신임 총리에 대해 그녀의 말을 인용해 “똑똑하면서도 패션을 좋아한다”고 자랑한다. 수백만원대 비비언 웨스트우드 슈트를 즐겨 입는 그녀의 취임에 옷의 가격은 화제가 아니었다. 영국은 손가락질보다 그녀의 센스가 불러일으킬 새바람을 기대했다.

우리도 한번쯤 자신의 당당한 취향으로 고가품 논란을 잠재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 지난 대선 때 고가 의자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문재인 대선 후보가 “나는 아름다운 의자를 좋아한다. 찰스 임스의 라운지 체어는 무리해서라도 한번 가져보고 싶은 꿈의 의자였다. 1956년부터 팔린 의자가 60년이 지나도 600만원에 팔리는 이유를 고민하고 있다”며 고부가가치 산업에 대한 비전으로 맞받아쳤더라면 어땠을까. 무턱대고 사치스럽다고 욕먹었을까.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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