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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불신의 뿌리

중앙일보 2016.08.16 20:02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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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대기자

휴가철 지겹게 들었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그만두는 거야?” 기분 좋은 리우 올림픽 화제를 깨고 어느 틈에 그 이야기를 슬쩍 꺼낸다. 필자가 인사권자도 아닌데. 시원한 답을 못 들으면 필자에게 따지듯 쏟아낸다. “다른 공무원이면 벌써 옷 벗겼어.” 생각보다 여론이 좋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기 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결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게 할 뿐”이란 것이다. 그는 또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 확산’을 지적하며 “모든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씀이다. 박 대통령의 말씀에 공감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헬조선’이란 말이 왜 나왔을까.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그 ‘마음’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내일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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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교육이 ‘기회의 사다리’가 되고 개개인의 역량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다리가 로또 같은 일확천금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가난 속에서도 모든 것을 바쳐 자식들을 교육’시킨 것이 내 아들도 우병우·진경준처럼 만들겠다는 것이라면…. 고시에 합격하고, 부잣집 재산관리 사위가 되고, 비상장 주식 받아 수백억원대 재산 챙기고…. 그것은 기회의 사다리가 아니라 또 다른 절망의 사다리가 아닌가.

우 수석의 아들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한국의 어머니들로부터 눈물을 뽑는 병역의무를 의무경찰 꽃보직에서 보낸다. 그것도 모자라 열흘 중 사흘은 외출·외박을 하고 최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이철성 경찰청장 내정자 아들은 강원도 철책선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공직자가 그러리라. 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우 수석 아들만 보인다. 그런데도 ‘욕하지 마라, 마음먹기 나름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워도 기댈 언덕이 있으면 견딜 수 있다. 신문고 같은 것이다. 민정수석이야말로 그런 믿음이어야 한다. 개발 초기인 박정희 시절을 지금과 비교하긴 무리다. 단기간에 성장을 추구하려니 부패를 근절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서정쇄신(庶政刷新)을 강조했다. 수시로 부패 공직자를 엄벌해 공직 기강을 잡았다. 공직자가 발전을 주도해야 했다. 국민에게 희망이 있어야 했다. 1980년대 5공 시절 ‘민나 도로보’(모두 도둑놈)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 방송 드라마가 만든 유행어다. 지금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을 요약하면 바로 그대로다.

우 수석은 일방적인 매도가 억울할 수 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이란 자리 때문에 제대로 해명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훌훌 털고 솔직하게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혹시 작은 위로가 되지는 않을까. 진경준 검사장에 대한 검증 실패, 하나만으로도 그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고위 공직자는 자기 관리가 엄격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무너졌다. 누가 승복하겠나. ‘운이 나빴다’고 하지 않을까. 최소한 진 검사장 재산이 드러난 이후라도 그를 비호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대통령에게 부담을 안겼다.

넥슨과 처가의 강남 부동산 거래와 관련한 말 바꾸기도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가 개입했다는 증거들이 계속 나온다. 시중의 여론은 그것도 따지지 않는다. "뻔하다” 그 한마디다. “일반 공무원이었으면 벌써 구속해 수사하지 않았겠느냐”고 한다. 백번 양보해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맨 것이라 해도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절세(節稅)’한 것은 고위 공직자, 특히 민정수석이 할 짓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누리는 합법적 ‘배임·횡령·탈세’ 아닌가. 송파 세 모녀는 집세와 공과금을 70만원이나 남겨놓고도 자살을 택했다. 요금 폭탄이 겁나 갓난아이·노약자까지 땀띠로 고생한다. 그때 우 수석은 자녀의 최고급 외제차와 백화점 쇼핑까지 법인 비용으로 털어냈다. 이것까지 이 정권의 도덕성으로 떠안을 건가. ‘콩 한 쪽도 서로 나누는 건강한 공동체 문화’라는 말이 얼마나 허탈해지는가.

불법 전입 한 번으로 장관과 총리 후보가 낙마한다. 그 일을 맡은 게 민정수석이다. 추상같아야 할 공직 기강이 엉망이 됐다. 그의 처신은 이 정부의 도덕성이다. 공직으로 축재(蓄財)하려는 바이러스가 공직사회에 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논란이 커지는데도 입을 다무는 정부를 보면 그렇게도 사람이 없나 개탄스럽다.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는 길이다.

김진국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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