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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깬 건 용인해도 안 닦는 건 용서 말아야 관료 바뀐다”

중앙일보 2016.08.16 02:36 종합 5면 지면보기
“저출산이 심각한데 아이 낳을 때 주는 세제 혜택을 좀 늘려야 되는 것 아닌가요?”

공직사회 ‘혁신 DNA’ 심으려면
당·청이 모든 걸 결정하는 상황선
관료들 눈치 보고 부처 간 핑퐁 일쑤
상부 오더 없으면 움직이지 않아
승진 등 인센티브 인사제 만들고
정부·국회 정책 협업 모델도 필요
국회는 방향, 나머진 정부 맡겨야

“지금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좀 더 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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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세제 개편안 당정협의에서 새누리당과 기획재정부 핵심 관계자 사이에 오간 대화다. 이날 불쑥 제기된 출산공제 확대 방안은 며칠 뒤 나온 정부의 최종안에도 반영됐다. 연간 300억원가량의 세금을 깎아주는 이 방안을 정부가 실제 검토한 기간은 사흘여에 불과했다. 실무자의 초점은 정책 효과의 면밀한 검토보다는 여당의 체면을 살려줄 ‘성의 표시’ 수준에 맞춰졌다. 기재부 관계자는 “이미 세제 개편안의 틀을 짠 상황이라 의미 있는 수준의 대책을 넣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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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월 가정용 전기요금을 깎아주는 대책은 불과 한나절 사이 나왔다. 폭염이 이어지며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에 대한 불만은 고조됐다. 하지만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산업부 관계자는 “누진제를 완화하면 결국 전기를 많이 쓰는 사람에게 유리한데 당장 ‘부자 감세’ 논란이 일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굳이 ‘벌집’을 건드릴 의사가 없다는 얘기였다. 이런 산업부가 박근혜 대통령이 “조만간 좋은 방안을 발표할 것”이란 언급을 하자 불과 6시간 뒤에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방안을 내놨다.

‘사흘짜리 저출산 대책’ ‘한나절짜리 전기요금 감면안’은 최근 정책의 시계(視界)가 어느 정도로 짧아졌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를 자초한 건 ‘오더(지시)’가 있어야만 움직이는 수동적 정부다. 단임제 정권에서 임기 말이 다가오면 관료들은 늘 ‘낮은 포복’을 했다. 이번엔 그 시기가 빠르고, 정도도 심하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청와대와 당이 모든 걸 결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관료들은 정치적 부담을 떠넘기고 납작 엎드려 있다”고 말했다.

이 결과 갈등 조정이 필요하거나 국회에서 논란이 될 만한 현안을 두고 부처끼리 ‘핑퐁 게임’을 하기 일쑤다. 미세먼지 대책 마련 과정에서 환경부는 기재부 관할인 유류세 인상을, 기재부는 환경부 관할인 환경부담금 인상을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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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이 뒤따르는 일은 최대한 미루고 보려는 관료들의 태도로 인해 피해는 고스란히 민간 몫이 된다. 국토교통부가 연초 입법 예고를 통해 아파트 리모델링 때 허용하기로 했던 가구 간 내력벽(건물 하중을 견디도록 설계된 벽) 일부 철거를 최근 안전 문제를 들어 2019년까지 재검토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 말만 믿고 준비했던 사업계획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관료들이 나서지 않으려는 배경에는 변양호 신드롬이 있다. 정책을 주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거나 심지어 사법기관의 수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앞장설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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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을 깨우려면 하드웨어적 제도 개편과 소프트웨어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제도적으로 ▶국회 분원 설치 ▶불필요한 공무원 호출 제한 ▶장관을 비롯한 간부급의 일정 효율화 같은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인사와 평가 개편도 꼭 필요한 과제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열심히 하다 그릇을 깨는 건 용인해야 하지만 그릇을 닦지 않는 건 용서하면 안 된다”며 “안주하는 공무원에게는 불이익을 주고, 열심히 하는 공무원에게는 승진 등 인센티브를 주는 평가·인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정부의 복지부동을 막고 정책 무게 중심 이동의 ‘연착륙’을 위해선 정부와 정치권 간 새로운 ‘협업 모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 군사독재 시절에는 국회가 행정부의 ‘거수기’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거꾸로 국회의 옥죄기에 행정부가 위축되는 상황”이라며 “국회가 정책의 큰 방향을 정하고 세세한 부분은 정부에 재량을 주는 방식으로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민근·하남현·황의영 기자 jm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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