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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국민이 박수치는 개혁…23년 전 금융실명제처럼

중앙일보 2016.08.16 00:01 경제 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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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12일 오후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오른쪽)이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는 내용의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TV 앞에 있던 국민들은 하단에 뜬 ‘대통령 긴급명령 발표’ 자막에 깜짝 놀랐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담화문을 읽어내려갔다.

사회·경제 혼란기에 돌아보는
1993년 8월12일 ‘남북통일작전’

정·재계 기득권층 동의 안 한 개혁
YS “나부터 목숨 걸겠다” 총대 메
“비밀 누설 땐 구속” 결단력 발휘
당초 우려와 달리 경제 긍정 영향
정부 4대부문 구조개혁에 큰 시사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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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금융실명제 소식을 보도한 주요 신문 지면. [중앙포토]

시행 시점은 당일 오후 8시부터. 속전속결이었다. 홍재형 당시 재무부 장관의 회고. “그해 5월 YS가 ‘칼국수 먹으러 오라’기에 갔더니 (YS가) ‘금융실명제를 해야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다. 그날부터 실무는 재무부가 진행하고, 최종 결정은 이경식 당시 부총리와 내가 해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아 확정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희망에는 마침표가 없다』)

준비부터 발표까지 모든 게 극비였다. YS의 ‘경제 교사’였던 박재윤 당시 경제수석마저 발표 1주일 전에야 알았다. “나는 경기가 확실히 회복되는 94년 봄에 발표하는 게 낫다고 건의했지만 YS는 취임 첫 해에 이 일을 마무리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런 어려운 일은 취임 후 6개월 내 처리 못 하면 영원히 못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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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금융실명제 소식을 보도한 주요 신문 지면. [중앙포토]

YS는 정·재계 동의를 얻지 못하는 금융실명제의 시행을 위해 모든 걸 극비리에 추진하는 결단력을 발휘했다.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금융실명제를 준비한 실무진 전원은 사표부터 썼다. YS는 “비밀이 누설되면 실무진 전원을 구속시키겠다”며 “목숨 걸고 비밀을 지킬 것”을 주문했다. 14명의 실무진은 두 달여 간 집에서 출퇴근하는 대신, 경기도 과천의 주공아파트(5단지 304호)와 서울 강남의 휘문고등학교 앞 건물에서 ‘거의 감금된 채’로 합숙 생활을 했다. ‘남북통일작전.’ 이들이 보안 유지를 위해 붙인 작전명이었다. ‘국제투자연구소 사무국.’ 휘문고 앞 사무실에 붙인 위장 간판이었다.

당시 실무진의 일원이었던 백운찬 한국세무사회장은 “보안 문제로 과천에서 합숙하면서 가족들한테는 해외 출장을 갔다고 둘러대기도 했다”며 “비밀 유지가 없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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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발표 직후 정·재계는 경악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경기가 침체될 거란 목소리가 쏟아졌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2%포인트는 떨어질 것”이란 이경식 부총리의 보고에 YS는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우려와 달리 금융실명제는 빠르게 정착됐다. 잠시 주춤했던 증시는 다시 안정됐고, 한국 경제의 대외신인도는 제도 시행 전보다 높아졌다.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확보되면서 탈세와 자금 세탁이 어려워졌고, ‘한국 사회에선 당연한 듯 행해지던’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고리도 끊기기 시작했다. 두 전임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은 검찰의 자금 추적 끝에 뇌물수수 사실이 적발돼 95년 구속됐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92년 국내총생산(GDP)의 29.1%였던 지하경제 비중은 제도 시행 직후인 93년 24.3%로 감소했고, 20년 후인 2013년엔 20.3%까지 개선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자초하는 등 대통령으로서 과(過)도 많았던 YS였지만, 금융실명제 시행만큼은 그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된다.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금융실명제 실시는 시대적 숙명이었다”면서 “모든 금융거래를 투명화하고 과세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전했다. 그의 말대로 제도 시행 후 세원 노출로 보다 안정적인 세수 확보가 가능해졌다.

특히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과단성 있는 조치로 기득권 저항을 물리치면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건 오직 YS라서 가능했다는 평이다. 앞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1982년과 88년에 각각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했지만 정·재계의 거센 반대에 흐지부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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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청렴한 사회’를 만들려면 리더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믿었다. 93년 취임 3일 만에 열린 첫 국무회의에선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자신과 부인 손명순 여사 명의의 재산을 공개했다. 이후 그해 국회에선 공직자윤리법이 통과돼 헌정 사상 처음으로 1급 이상 공직자 1160여 명의 재산이 일괄 공개됐다. 다만, 정작 차남인 김현철씨의 비자금 의혹엔 고개를 숙여야 했다. 97년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다”며 국민 앞에 사죄했다.

‘YS의 유산’ 금융실명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보완되고 있다. 당초 취지와 달리 불법 차명계좌가 계속 방조된다는 지적에 2014년 5월 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 그해 11월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를 원천 금지토록 개정된 금융실명제법이 시행됐다. 종전엔 ‘합의’ 하에 실소유자에게도 인정되던 차명계좌 소유권을 명의자로 제한했다. 실소유자는 본인 자금임을 적극 입증해야 하며, 불법 차명거래로 밝혀지면 실소유자와 계좌 명의자, 알선·중개자까지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의 처벌을 받게 됐다.

금융실명제와 상보적 관계인 ‘금융정보분석원(FIU)법(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도 개선됐다. 2001년 출범한 FIU는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 세탁 관련 ‘혐의거래보고(범죄가 의심되는 금융거래인 경우 금융기관 등이 의무적으로 보고)’ 등 금융정보를 수집·분석한 뒤, 이를 법 집행기관에 제공해왔다. 2013년 7월 법 개정안 통과 후엔 FIU에 등록되는 모든 금융정보들이 조세·관세 관련 범죄 조사뿐 아니라 세무조사나 체납징수에도 활용되고 있다. 일반 국민은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2000만원 이상의 현금을 금융회사에서 입출금 하면 FIU에 의무적으로 보고된다(‘고액현금거래보고’).

지난 12일로 실시된 지 23년째인 금융실명제는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안겨준다. 헌법재판소의 지난달 28일 합헌 결정으로 다음달 28일부터 예정대로 시행될, 일명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역시 지금보다 청렴한 사회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 금융실명제가 일각의 우려를 딛고 사회와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듯 김영란법이 성공적으로 정착되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사회학과 교수)은 “한국의 부정부패사(史)는 김영란법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을 정도로 이 법 시행의 여파는 클 것”이라며 “그동안 산업화 과정에서 일반적 관행으로 용인돼 왔던 한국식 접대·청탁 문화가 근절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과 같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일수록 정부가 93년의 YS처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정부가 추진 중인 4대 부문(공공·금융·교육·노동) 구조개혁은 뚜렷한 성과 없이 지지부진해진 상태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YS는 개혁을 위해 참모들에게 ‘목숨을 걸라’면서 스스로도 목숨을 걸 것만 같은 진정성을 안팎으로 보이는 등 강한 카리스마의 대통령이었다”며 “그때와 사회·경제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리더가 솔선수범하고 진정성을 보이면 어떤 개혁이든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97년 YS에 대해 비판적인 저서(『3김을 넘어서』)까지 남긴 학자였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YS 같은 리더가 그리울 만큼’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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