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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알 수도 있는 사람 #2. 가속도

중앙일보 2016.08.1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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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도 있는 사람  #2. 가속도

용주는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사타구니에 땀이 찼다. 금방이라도 시큼한 냄새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운전대 잡은 손에 힘을 빼어보지만, 팔뚝은 금방 굳어버렸다. 안개 속에서 누이가 남색 치마를 훌렁 뒤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떠나있던 누이. 무엇이 누이를 기억의 창고로 초대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속도 계기판의 바늘이 여전히 춤을 추었다. 용주는 계기판에서 눈을 뗐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뛰어드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먼저 출발한 참가자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의 빛이 안개의 입자들에 산란되어 10m 앞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레이싱에 참가한 다른 차들은 좌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순간 커다란 두 개의 차폭등이 누이의 흰 허벅지 속살처럼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15도쯤 왼편으로 가까스로 핸들을 꺾었다. 대형 화물 트럭이었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트럭을 비켜 지나갔지만 적재함의 모서리에 오른쪽 백미러가 작살났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눈은 미친 듯 손을 흔들며 유리창을 닦는 와이퍼를 쫓아다녔다. 목을 지나 관자놀이로 올라가는 동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래도 다리는 무감각해져 엑셀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용주는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번지자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시야까지 걷힌 건 아니었다.
 
도로 위에는 가로수나 가로등은 물론 아스팔트 위의 도로 구분선마저 사라졌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고 안개를 먹은 바람마저 길을 잃고 흩어져버렸다. 속도계 바늘은 시속 0km에서 220km까지 널을 뛰었다. 엔진의 열기와 굉음이 차 실내를 가득 채웠다. 살갗의 잔털들이 일어났다. 짜릿한 속도감이 서서히 용주의 몸을 휘어 감았다.
 
‘그만 포기할까? 다른 차들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참가비는? 그 여자 돈만 챙겨서 튄 거 아냐?’
 
불안한 생각들이 소름처럼 돋아났다. 용주는 직감적으로 레이싱에 참가한 차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차는 어느새 월드컵 경기장을 앞둔 마지막 곡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바깥 차선 쪽으로 5도쯤 위로 올라간 도로였다. 바깥쪽 차선에서 곡선을 그리며 안쪽 차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속도를 높이자 차가 아스팔트에 착 가라앉았다. 차의 무게는 물론 노면의 질까지 한순간에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분 좋은 중력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2차선에 빨간색의 차 한 대가 느닷없이 출현했다. 용주는 속도를 줄이는 대신 엑셀을 더 깊이 밟았다. 빨간색의 차를 너무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바깥 차선 쪽으로 핸들을 틀 수도 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었다. 그의 차가 빨간색의 차를 거의 닿을 듯 곁을 스쳐 지나갔다. 빨간색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가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흩어지지 못한 채 안개에 묻혀 제자리를 맴돌았다. 용주의 입에서 저절로 낮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빨간색의 차는 이내 룸미러에서 사라졌다.
 
월드컵경기장 이정표가 나타났지만 먼저 출발한 차들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 서울로 접어들면서 안개의 밀도가 낮아졌다. 용주는 속도를 더 높였다.
 
‘용미가 살아있을까?’
 
용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주는 입안의 침을 모아 창밖으로 내뱉었다. 피를 먹은 침 덩어리가 빠르게 뒤로 사라졌다. 요즘 들어 용미가 꿈에 나타났다. 파란 치마에 치마 밖으로 꺼내 입은 흰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용주는 한동안 그녀의 등에 업혀 자랐다. 그 무렵엔 그녀를 엄마로 알았었다. 학교 수업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앉아 있으면 용미가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어떤 남잔 내 머리만 하염없이 쓰다듬다가 가, 어떤 남자들은 하루 종일 말만 하다 가고, 어떤 예쁜 여자들도 찾아와 여자들은 울다가 가, 난 나를 안고 등을 두드려주는 게 좋아. 용미의 말이 사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었다. 진실을 거짓처럼 능청스럽게 말할 줄 알았고 거짓을 진실로 위장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용미는 의도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말이 흘러나왔고 다들 그렇게 믿었다. 아버지와 어머닌 용미를 감추지 않았다. 감춘다고 감추어지지도 않았다. 좁은 곳을 어두운 곳을 견디지 못했다. 방에 앉아 있었던가 싶으면 어느새 들판에 나가 바닷바람 맞으며 하루 종일 수평선을 응시하는 날도 있었다.
 
용주의 차가 경기장 진입 램프로 들어선 후 경기장 앞 대로로 빠져나왔을 때 몇 대의 차가 경기장 정문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먼저 도착한 차도 있었다. 거짓말처럼 안개가 옅어졌다. 용주가 도착했을 때 수인이 우승자인 영미와 마주 서있는 게 보였다. 용주는 맥없이 웃었다. 영미 주변에 선 남자들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잠시 후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졌다. 영미가 돈뭉치를 들고 있는 수인의 뺨을 후려쳤다. 술렁거리던 남자들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용주는 차에 앉은 채 영미와 수인을 구경했다.
 
“누가 죽기라도 했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전화쯤은 받아줄 수도 있었잖아!”
 
“호 대단한데, 운전하면서 전화한 게 너였어?”
 
수인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 영미는 돈을 받아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무서우면 거리에 나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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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의 얼굴이 전광판의 푸른 네온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영미는 그녀를 외면한 후 차를 타고 사라졌다. 수인과 남자들은 영미의 차가 옅은 안개와 어둠 속에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영미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수인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남자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 용주의 차가 세워진 곳까지 걸어왔다. 수인이 다가온다는 사실 때문에 용주는 허둥대다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힘주어 잡았다.
 
“이봐요, 스쿠프. 안개등도 나갔던데 빨리 왔네요. SR, 처음이죠?”
 
그녀는 차 지붕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힌 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용주를 들여다보았다. 안개등? 용주는 힐끔 중앙 계기판을 살폈다. 안개등이 켜져 있다는 표시가 감귤 빛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외부의 전구가 나간 모양이었다. 용주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어깨를 조금 들썩였다. 고장 난 안개등 때문에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꼴찌로 도착한 그를 위로했다.
 
“일상이 SR 아닌가.”
 
용주는 헤드라이트가 닿지 않는 곳의 어둠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인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용주에게 세상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여자이지만 여자가 아닌 존재들이었다. 여자로 해석되지 않지만 여자로 해석하지 못하면 어떤 말도 갖다 붙일 수가 없었다.
 
‘그딴 게 뭐가 중요해, 형이나 똑바로 살아.’
 
번듯한 직장을 가진 집안의 유일한 남자. 한동안 용희는 비교대상이었다. 인간의 표본이었고 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더더욱 타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우승자가 한 잔 사는 건데. 술 한 잔 하러 가겠어요?”
 
그녀는 용주를 적당히 부추기며 유혹했다. 그녀는 뒤에서 서성거리는 남자들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 용주는 일렬로 늘어서있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안개는 제 역할이 끝난 듯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감귤색의 가로등 불빛 아래 차들이 선명하게 빛났다. 용주는 수인의 유혹을 거절했다. 그게 처음 출전한 사람이 보이는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도 좀 밀렸고……. 아직 댁들도 잘 모르고…….”
 
용주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수인이 한 발 물러났다.
 
“처음치고 실력이 좋았어요. 번트로즈마이어 못지않았으니까.”
 
수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지껄인 후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다들 겁이 없네요.”
 
용주는 기어를 1단에 놓았다. 엔진이 몸을 떨었다. 용주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럼, 앞으로 종종 봐요.”
 
수인은 남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힐끔힐끔 용주를 쳐다보았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 가볍게 인사하고 각서에 사인하고 돈을 건넨 후 레이싱이 끝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 20여 분, 잠깐 느닷없이 용미가 떠올랐지만 그 시간 동안 용주는 질이 다른 인생을 경험했다.
 
“어이, 스쿠프 다음에 또 봅시다.”
 
남자들이 손을 들거나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용주에게 말을 건넸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용주에겐 조롱처럼 들렸다.
 
‘아빠 못 봤니? 치마 새로 사준다고 그랬는데.’
 
용주는 차를 거칠게 유턴시켰다. 타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수인과 남자들의 환호성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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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 추계예술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 상명대 대학원 소설 창작학과 재학 중
· 2012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

그 외의 작품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불의 기억’
· ‘13월’
· ‘9일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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