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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알 수도 있는 사람 #1. street

중앙일보 2016.08.0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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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도 있는 사람  #1. street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中

 
안개? 젠장, 이건 계산에 없던 변수다. 용주는 떼 지어 밀려오는 안개를 노려보았다. 그는 브레이크 페달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덜덜 떨었다. 속도 계기판에서 파리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용주는 파리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전방을 주시했다. 파리는 유유히 제 맘대로 실내를 날아다녔다. 용주는 제 목을 쓰다듬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안개는 슬쩍 강둑을 넘어 빠른 속도로 철조망을 뚫고 올라왔다. 뿌연 실루엣은 수로 변의 빽빽한 갈대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처음엔 차선 하나를 지우더니 삽시간에 왕복 8차선 도로를 뒤덮었다. 흰 그물은 어둠조차 어쩌지 못했던 산의 능선들을 차례차례 지운 후 강마저 먹어버렸다. 인간 하나쯤은 쉽게 잡아먹을 이빨이 저 안에 숨겨져 있을 터였다. 안개는 점차 거대한 괴물로 변해갔다. 가까운 곳에 있는 가로등 불빛들은 빛과 어둠의 경계를 잃고 흩어졌다. 95.1Hz
 

···오십칠 분 기상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현재 서해 상에서 밀려온 고온 다습한 공기가 동북쪽에서 내려온 차가운 기온과 부딪히면서 한강과 가까운 경기 북부 일대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차량 운행에···.”


뒷좌석 쪽에서 맴돌고 있는 줄 알았던 파리가 이번엔 라디오 주변에서 달라붙어 방정맞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로 위엔 모두 여덟 대의 차가 2열 횡대로 서서 그르렁거렸다. 빨간 차폭등이 물 입자에 젖어 춤을 추었다. 1차선 앞쪽에 세워져 있던 까만색의 아반떼가 헤드라이트의 불을 밝혔다. 불빛이 물 입자들을 헤치고 나갔지만, 맥없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일곱 대의 차도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켰다. 불빛들은 촘촘하게 얽힌 물의 그물을 확인했다. 그래도 차들은 출발선에 선 말들처럼 콧김을 쏟아내며 씩씩댔다.
 
‘···레이싱에 참가할 차량의 조건에 대해서는 매달 초에 공지하는 조건에 따른다. 어떤 레이싱이든 배기량 2,000cc 아래의 차만 참가 가능하며 장소는 참가할 의사가 분명한 회원에게만 개별로 통보한다. 참가비는 어떠한 경우에도 반환하지 않는다. 레이싱 중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95.1Hz에서 자정을 알리는 시보가 터지면 스타트다. 어떠한 기상 상황에서도 출발한다···’
 
용주는 운전자들의 얼굴을 플래시로 훑던 수인의 눈을 떠올렸다. 불빛 뒤편에 숨어있던 그녀의 눈빛은 짐승처럼 이글거렸다. 그 눈빛 안개를 만났을 때의 누이의 눈빛이었다. 금방이라도 수인이 옷을 훌렁 벗어버릴 것만 같아 용주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안개를 먹은 어둠에 젖어 형체도 불분명했고 옷 벗을 기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색의 외제 차와 함께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 스타일에 검은색 가죽점퍼와 가죽 치마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둠과 안개를 휘저으며 참가자들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왔다. 그녀가 바로 용주를 한 달 내내 들뜨게 만들었던 SR(Street Racing) 동호회의 주인이었다. 참가자들은 긴장했다.

그녀가 타고 온 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델의 차였다. 차는 금방이라도 튀어나가려는 듯 뒤가 들리고 앞이 내려앉은 자세였다. 차의 외관 어디에도 차량 모델명은 물론 제작사의 로고도 없었다. 2인승 쿠페였으며 빠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북을 두드리는 듯한 엔진 소리가 났다. 폭이 넓고 꽤 두꺼워 보이는 타이어. 타이어는 스테인리스 질감의 휠을 물고 있었다.
 

제가 홍수인이예요.”


그녀는 참가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어 종이 한 장을 내밀고 운전자들에게 돈과 사인을 받았다. 몇 가지 세부적인 사항들이 더 있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그녀의 눈만 자꾸 떠올랐다. 용주는 끝없이 그녀의 눈을 훔쳐봤다. 그녀는 서약서와 돈을 챙겼다. 그동안 그녀의 차는 쉬지 않고 흰 배기가스와 북소리를 토해냈다. 그녀는 잠시 후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스타트 1분 전, 1차선 뒤편에 서 있던 검은색 티뷸런스의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차의 실내등이 켜지자 운전자의 모습이 보였다. 빨간 헬멧이 눈에 들어왔다. 여덟 명의 참가자 중에 유일하게 헬멧을 준비한 사람이었고 유일한 여자 한영미. 그녀는 차창을 내려달라는 듯 손을 팔랑거렸다. 정신없이 날갯짓하던 파리가 창밖으로 날아갔다. 운전에 집중할 땐 나타나지 말아야 할 텐데.
 

이렇게 안개가 짙게 끼었는데도 레이싱을 할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나도 잘 모릅니다.”


용주는 앞에 선 네 대의 차를 눈으로 더듬으며 대답했다. 차들은 지붕을 적신 안개를 털어버리려 몸을 떨었다.
 

그 여자한테 전화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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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또 물었다.

나도 잘 몰라요.”


용주는 다른 차들의 차창을 살폈다. 차창을 연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이런 안개라면 비행기도 못 뜰 거예요. 누군가 나서서 레이싱을 미뤄야 해요. 그 여자가 그냥 돈만 챙겨서 도망가 버린 건지도 몰라요.”


그녀는 쉬지 않고 말했다. 발바닥에 고인 긴장이 하나둘 풀어져 버렸다. 그 사이···. 너 내 치마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보여줄까? 남자들은 내가 치마만 들치면 다 좋아해. 남자들은 총도 주고 국밥도 줘, 넌 뭘 줄래? 총과 국밥,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을에 총을 가진 남자는 없었다. 그래도 소문은 자랐다. 남자들이 누이를 탐낸다는 말. 그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아무도 몰랐다.
 
‘너무 책을 많이 읽어서 미쳤다, 군인들한테 고문 받아 죽다 살아났다, 총부리로 쑤셨을 텐데 살아난 게 용하다, 여잔 그저 시집이나 잘 가는 게 장땡이다.’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지겹도록 들었던 문장들. 엄마는 어떤 이야기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사실이든 진실이든 아님 변명이든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누이가 사라진 후 누이의 문장들도 사라졌다. 강을 품은 오른편의 어둠이 안개 때문에 더 걸쭉해졌다. 뚫고 나갈 수 없는 침묵이 눈앞을 서서히 가로막았다.
 

···자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정을 알리는 시보가 터지는 것과 동시에 배기가스를 한 움큼씩 토해낸 여섯 대의 차가 일제히 출발했다.
 
아, 젠장!
용주도 엑셀 발판을 힘주어 밟았다. 물의 그물을 뚫고 들어간 차들의 형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빨간 차폭등만 남겼다. 전방에 흩어져있던 차폭등도 뿌연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용주의 차는 빨리 출발하지 못했다. 엑셀을 밟자 rpm이 급격하게 올라갔다. 엔진은 헛돌았다. 차는 출발하지도 못하면서 요동쳤다. 공회전이 멈추자 엔진에 힘이 실리며 변속 충격이 온 후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순간 용주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던 영미의 차가 안개를 헤치며 쏜살같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출발은 꼴찌였다. 영미의 차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용주의 머릿속을 안개가 하얗게 채웠다.
 
‘1등으로 달리는 차의 꽁무니를 따른다. 안개 속에선 그게 안전하다. 적어도 목적지를 5km 정도 남겨두었을 때 추월해야 한다. 추월이라면 자신 있다. 지금껏 내 차를 추월한 놈은 별로 없다.’

 
출발하기 전 세워두었던 나름의 계획은 무용지물이었다. 용주는 엑셀을 밟았다.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차에 달라붙었다. 불과 몇 초 사이, 전방 어디에도 빨간 차폭등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엑셀을 더 깊이 밟았다. 시야는 짧았다. 지금 속도는 시속 100km를 넘었다. 앞차를 발견하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해도 추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전문 레이서들조차도 속도를 줄일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게다가 도로는 전문 경기장이 아니라 다른 차들이 언제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속도를 줄여야 했지만 용주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심하게 떠는 핸들과 실내를 메운 엔진의 굉음이 풀어졌던 흥분을 다시 뭉쳐 날뛰기 만들었다. 누이의 문장들도 그녀의 치마도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용주는 운전대를 힘주어 잡고 엑셀을 더 깊이 밟았다. 오른편에 ‘안개 상습지역’이라는 안내판이 홱 지나갔다. 속도계 바늘이 120km를 넘자마자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러더니 바늘은 제멋대로 속도 표지판을 오르내렸다. 속도 계기판을 두드렸다. 바늘은 고정되지 않았다. 얼마의 속도로 안개 속을 달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용주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내려쳤다. 문득 카센터를 하는 기성의 말이 불쑥 생각났다. 20년도 더 된 똥차로 레이싱에 나간다고? 그것도 그거지만 일반 도로에서 레이싱을 하는 게 더 미친 짓이야. 왜들 다들 못 미쳐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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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 추계예술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 상명대 대학원 소설 창작학과 재학 중
· 2012년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제8회 세계문학상 수상

그 외의 작품
·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
· ‘불의 기억’
· ‘13월’
· ‘9일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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