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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6개월마다 디자이너 수혈, 430년 생루이 명성 지킨 비결

중앙일보 2016.08.06 00:43 종합 1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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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루이의 제롬 푸제라 드 라베놀 CEO는 “아름다움과 실용성, 전통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생루이]

“고급 핸드백이 주력 상품인 에르메스가 왜 크리스털 와인잔이나 샹들리에를 만드는 생루이를 인수했을까 다들 궁금해하시더군요.”

명품 크리스털 만드는 ‘생루이’ CEO 라베놀

지난달 29일 한국을 찾은 제롬 푸제라 드 라베놀(53) 생루이 최고경영자(CEO)는 “두 브랜드는 오랜 전통, 10년 이상 숙련한 장인들이 일일이 손으로 작업하는 공정,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파기해 버리는 엄격한 품질 관리와 더불어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점까지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15년 넘게 에르메스에서 일하다가 2010년 생루이 CEO로 부임했는데 한 번도 이질감을 못 느꼈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에르메스는 생루이를 1989년 인수했다. 현재 65개국에서 360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는 지난 4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9층에 에르메스메종(식기 등 생활용품)과 함께 공동 매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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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여 작품을 전시해 놓은 생루이 박물관. 프랑스 북동부 시골에 있어 찾아가기 어렵지만 해마다 2만여 명이 찾는다. [사진 생루이]

생루이는 1586년 프랑스 북동쪽 로렌 지방 비치 지역의 작은 유리 공방에서 시작됐다. 올해로 430년, 에르메스(1837년 설립)보다도 약 250년이나 역사가 길다. 1767년 왕실용 유리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1781년에는 유럽 최초로 크리스털을 개발했다. 생루이라는 이름도 18세기에 루이 15세가 자신의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라베놀 CEO는 “생루이는 430년 동안 ‘시골 공방’을 옮기지 않고 한자리를 지켰다”며 “크리스털에 색을 입히는 방법, 세공하는 법, 금으로 장식하는 법 등 19세기에 개발한 기술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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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털 제품을 만드는 전통 틀 모양을 살려서 만든 LED 조명. [사진 생루이]

기술마저도 19세기 때 그대로라면 생루이의 ‘끊임없는 혁신’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생루이는 ‘전속 디자이너’가 없다. 6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는데, 매번 외부에서 디자이너를 선정한다. 회사 소속 디자이너도 몇몇 있지만 이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별도 브랜드를 운영하는 등 ‘전속’ 개념은 아니다. 생루이는 1920년대부터 외부 인력으로부터 디자인을 공급받았다. 다른 브랜드에서 유명 디자이너와 한시적으로 손잡고 내놓는 ‘협업 상품’(컬래버레이션 라인)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디자이너·브랜드의 협업 상품과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각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을 생루이 브랜드로 일시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디자이너가 공방에 와서 장인들과 교감하며 한시적으로 생루이의 일원으로서 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13년 디자이너 키키 반 아이크가 만든 LED 조명의 경우 공방 지하에 있던 수천 개의 검은 제조 틀(몰드)을 보고 난 뒤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다. 전통(제조 틀과 19세기식 커팅 기법)과 혁신(LED 조명)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 사례다. 전통이 미래를 창조하고 혁신을 만든다.”
매번 디자이너를 선정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그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는 이유는 뭔가.
“430년 동안 낡아서 도태되지 않고 전통을 지켜나가려면 새로운 피가 반드시 필요하다. 새로운 디자이너로부터 수혈받는 것은 이제 우리 DNA의 일부다. 사실 새 디자이너가 올 때마다 장인들과 충돌한다.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내면 장인들은 항상 ‘안 된다’는 말부터 먼저 꺼낸다. 매번 새로운 도전에 맞닥뜨리는 셈이다. 그런 긴장 속에서 아이를 낳는 것 같은 고통을 거쳤기 때문에 좋은 제품이 나온다.”
새로운 디자이너와 오래된 장인들이 조화를 이루는 건가.
“사실 디자이너뿐 아니라 장인도 매년 새로 뽑는다. 장인이 300명인데, 평균 연령이 35세다. 17~18세 때 들어와서 60대 초반 정도까지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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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제작한 2500㎏짜리 대형 샹들리에(사진 왼쪽), 와인을 따르면 표면의 굴곡진 줄무늬가 사라지는 잔. [사진 생루이]

흔히 장인이라면 몇 세대에 걸쳐 가업을 잇는 백발 노인을 연상하는데.
“물론 공방에서 평생을 보낸 장인도 적지 않다. 생루이에서는 40년 근속하면 금메달을 주는데 해마다 수상자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1400도 이상의 고열과 100㎏도 넘는 무게를 다루는 작업이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기 때문에 대개 60대가 되면 은퇴한다. 장인들이 은퇴하기 전에 도제 시스템을 통해 배워야 하니까 매년 새로운 인력을 보충할 수밖에 없다.”

라베놀 CEO는 “생산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크리스털 제품을 만들어 봤는데 엄청난 열기에 마치 내가 ‘베이징 덕’(꼬치에 꿰어 구운 오리 요리)이 된 기분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새로운 피’ 덕분인지 생루이에는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제품이 많다. 지난해 말에 나온 와인잔 ‘트위스트’는 화이트·레드 와인이나 보르도·부르고뉴 와인으로 구분해 잔 모양을 달리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와인의 숙성도에 따라 디자인을 달리했다. 5년 미만 와인용은 향이 잘 퍼지도록 잔 입구를 넓게, 5년 이상 와인용은 잔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 시음용 와인잔으로서는 드물게 세로 줄무늬 모양의 굴곡도 넣었다.

“이 굴곡진 무늬를 보고 모양은 예쁘지만 빛이 반사돼 와인색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걸 보세요.”

라베놀 CEO가 인터뷰 장소에 있던 빈 와인잔에 물을 따르자 거짓말처럼 물이 담긴 부분만 굴곡이 사라지고 매끈한 표면 아래로 찰랑거리는 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잔의 기둥 부분을 없애고 긴 잔과 짧은 잔을 맞붙인 형태로 만들어 아래위로 뒤집어서 마치 두 개의 잔처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톡톡 튀는 디자인은 큰 인기를 모아 꽃병으로도 만들어졌다. “짧은 잔 모양이 위로 가게 세웠을 때는 실제로 화병에 꽃을 꽂기 어려울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라베놀 CEO는 몸통은 짧고 잎이 긴 선인장을 멋지게 담아놓은 사진을 보여줬다. “제품에 스토리를 담아 고객에게 보여주는 것까지 브랜드의 몫이지요. 마치 이야기꾼처럼요.” 그는 “다음달에는 페이스북·인스타그램·웹사이트 등을 새롭게 정비할 예정”이라며 “온라인 마케팅은 사진으로 브랜드 특유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생루이는 에르메스처럼 개별 고객을 위한 ‘맞춤 서비스’도 한다. 라베놀 CEO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한 고객이 5000㎡(약 1500평) 규모에 천장 높이가 15m인 자택에 놓을 샹들리에를 주문하러 왔었다”며 “3D 컴퓨터 그래픽으로 시뮬레이션까지 해서 18개월 만에 220개의 전구, 8500개의 부품이 들어간 높이 9m, 무게 2500㎏의 샹들리에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어떤 부호가 얼마를 주고 그런 샹들리에를 주문한 걸까. 라베놀 CEO는 “그건 밝힐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맞춤 주문을 한 고객 정보와 제품 가격은 절대 비밀입니다. 에르메스와 생루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지요.”
 
[S BOX] 자몽 크기 문진(文鎭) 1개에 600만원, 중국인 홀린 12간지 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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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색감과 세공 기술을 살린 문진(paper weight)은 생루이 특유의 상품이다. 12간지를 활용한 제품 등 매년 한정판 디자인만 만든다.

생루이에는 바카라 등 다른 고급 크리스털 브랜드에서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 주력 상품이 있다. 바로 문진(文鎭·paper weight)이다. 오스카 와일드나 트루먼 카포티 같은 유명 작가도 생루이의 문진을 썼다.

20세기 초반 문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 생루이도 판매를 중단했다. 하지만 1952년 미국의 한 수집가의 ‘맞춤 주문’에 응하면서 다시 문진 생산을 시작했다. 지금은 ‘생루이=문진’으로 통할 정도다.

대개 자몽 정도의 크기인 생루이의 문진은 종이를 눌러두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장식품에 가깝다. 적당한 크기와 무게 외에는 기능적인 제약이 없기 때문에 15가지 색의 크리스털을 모두 활용하는 화려한 세공과 디자인 기술을 총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치의 공방 옆에 있는 생루이 박물관에서도 마치 장식품처럼 문진 바로 아래에 강렬한 빛을 비춰 문진의 문양이 꽃처럼 피어나도록 전시해 놓았다.

희소성도 문진의 가치를 높였다. 생루이는 매년 다섯 가지 정도의 새로운 디자인을 한정판으로 400~500개만 만든다. 전 세계 수집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특히 중국 시장 등을 노린 12간지 제품은 해마다 나오자마자 동난다. 2016년용 원숭이 문진은 75개 한정이었다. 대개 400만~600만원 선이고 고급형이 일반형보다 30% 정도 더 비싸다.

구희령 기자 hea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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