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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압제적 정권들의 삼난

중앙일보 2016.08.05 20:17 종합 2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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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소설가

얼마 전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 요원들이 버니 샌더스 후보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정보가 유출되었다. 러시아의 군정보국(GRU)과 연방보안국(FSB)에 연결된 해커들의 소행이라는 소식이 이어졌다. 러시아가 선호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려 러시아 정보기관들이 개입했다는 얘기다.

소련에서 민간정보는 국가보안위원회(KGB)가 맡고 군사정보는 GRU가 맡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정보기관이었던 KGB는 1970년대 이후 실질적으로 공산당을 대신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KGB를 FSB(국내정보), SVR(해외정보) 및 FAPSI(통신정보)로 나누어 위험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한 뒤 FSB는 다시 강력해졌다.

FSB의 득세로 위축되었던 GRU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소생했다. 이번 사건은 GRU가 옛 모습을 되찾았음을 보여준다. 원래 미국에선 GRU가 KGB보다 성적이 좋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얻도록 하려고 줄기차게 노력한 이승만을 끝내 가로막고 러시아의 한반도에 대한 이익을 지킨 국무부의 실력자 앨저 히스도 GRU를 위해 일했다. 당시 GRU 첩자들이었던 미국 공산당원들의 정체가 일부만 밝혀졌으므로, 이번 사건과는 무관하겠지만 GRU의 뿌리는 아직 남았을 수 있다.
 
 푸틴은 처음부터 정보기관을 통한 음습한 공작을 정책 수단으로 삼았다. 소치 올림픽에서 FSB가 선수들의 소변 샘플을 첩보 공작하듯 바꿔쳐 리우 올림픽에 많은 러시아 선수가 참가하지 못한 것은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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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안에선 푸틴의 정적들이 잇따라 암살되거나 조작된 혐의로 감옥에 갔고 해외에선 밉보인 러시아 부호와 전직 정보원들이 암살되었다. 한 전직 KGB 요원의 자랑대로 “공산주의 이념은 사라졌지만 그 비밀경찰의 수법과 심리는 남았다.”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푸틴 자신이 뿌리라는 사실이다. 그는 대학을 나오자 바로 KGB에 들어가서 16년 동안 일한 뒤 중령으로 물러났다. 이어 98년부터 이듬해까지 FSB 책임자로 일했다. 그의 세계관과 정책을 이해하려면 그런 이력을 고려해야 한다.

푸틴은 미국을 러시아의 주적으로 여겨 미국을 약화시키려 애쓴다. 85년부터 90년까지 냉전이 치열했던 시기에 정보전의 최전선 동독에서 일했으므로, 그로선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냉전에 아직 얽매인 강대국 지도자는 위험하다. 특히 러시아에 위험하다.

근본적으로, 그는 대결적이어서 정보전을 너무 중시한다. 정보전에서 소련은 미국에 완승했다. 만일 정보전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냉전에서 미국이 졌을 것이다. 정보나 공작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들이,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그것을 보장하는 이념과 체제 같은 것들이 역사의 물길을 이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른다. 그 점에서 큰 그림을 보고 러시아의 앞날을 걱정했던 고르바초프나 옐친과 다르다.

공산주의가 폐기되었는데 오히려 압제적 체제를 강화한 푸틴이 내세운 것은 공격적 민족주의다. 러시아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정책은 물론 당장엔 인기가 높다. 그러나 그것은 풀릴 수 없는 국제 분쟁들을 불러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키운다. 처음에 서방의 의표를 찔렀던 우크라이나 침공은 경제제재를 불러 러시아의 경제 규모를 줄였다.

전략적으로, 미국과의 대결에 집착하는 정책은 중국 문제를 키운다. 중국과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공유한다. 땅은 너르지만 사람들은 적은 시베리아로 중국의 거대한 인구와 자본이 확산되는 상황은 러시아 지도자들의 악몽이다. 푸틴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중국 공산당 정권은 압제적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공격적 민족주의를 추구해 왔다. 양국이 부딪칠 가능성은 커지는데, 서방과의 대결에 몰두하느라 러시아는 점점 더 중국에 의존한다.

미국과 유럽의 약점들을 파고들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푸틴은 압제적 국내 정치, 공격적 민족주의, 그리고 마찰적 국제관계라는 삼난(trilemma)에 부대낀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모든 압제적 정권들이 맞는 문제다.

일반적으로 삼난은 최적화가 어렵다. 압제적 정권이 맞는 삼난은 민족주의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특히 어렵다. 한번 고양된 민족주의는 강력한 지도자도 누를 수 없다. 지금 중국 시진핑 정권이 맞은 어려움이 본질적으로 이것이다. 중국이 남중국해에 관한 중재에서 완패한 뒤 우아하게 물러설 기회를 놓치고 빠져나올 수 없는 외교적 구덩이로 들어간 것도, 그리고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거칠게 반응하는 것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야 설명될 수 있다.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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