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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뭣이 불쌍한디

중앙일보 2016.08.05 03:00 종합 2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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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5년 전엔 판사가 문제였다. 같은 지역에서 십수 년씩 근무하는 향판(鄕判)들이 금품을 받고, 친형을 법정관리 기업의 감사로 선임해 논란이 됐다. 시민단체에 물어 그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향판인 A부장판사를 찾아갔다. “약속도 안 잡고 오셨어요?” 직원이 까칠하게 물었다. “바쁘시면 기다릴게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제야 문이 열렸다.

“아이고, 내가 우리 기자님 불쌍해서 (시간 냈어요).” A부장은 내 이력부터 훑었다. 갓 입사한 병아리 기자임을 확인한 뒤 긴장이 풀렸는지 갑자기 ‘기자 불쌍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만 났다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뻗치기’를 해야 하고, 그렇다고 기사 하나에도 지켜보는 눈, 거치는 손이 많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으실 것이고….”

어리바리한 수습기자는 별말 못하고 앞에 놓인 커피만 홀짝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치고 나갔어야 했는데…. ‘판사가 친족 일자리 챙겨 주거나 돈 받은 것에 대한 의견부터 말씀해 주시죠’ ‘기자들 걱정해 주시기 전에 판사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봐주고 벌줄 수 있어 좋습니까?’ 3년 뒤 향판 제도는 결국 폐지됐다.

뼈아픈 기억을 떠올린 건 정명훈 전 서울시향 예술감독 때문이었다. 지난달 검찰과 경찰에 출석한 정 전 감독은 기자들을 향해 “불쌍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항공권 횡령 혐의로 조사를 받고 나온 피고인에게 “혐의를 인정하십니까”라고 묻는 기자에게 그는 “그런 질문은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라면서 “젊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해야 하다니 불쌍하다. 잘 커 주길 바란다”며 자리를 떴다.

이런 일이라면 어떤 일인가. 땡볕더위에 길바닥에서 몇 시간씩 사람을 기다리는 일? 대답을 피하려는 사람에게 계속 묻는 일? 정 전 감독도 더 좋은 공연을 위해 수십 년간 치열한 연습을 했을 거고,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대껴 왔을 텐데. 그들의 일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고, 누군가의 일은 그렇지 않다는 뜻인가. 오히려 나는 경찰서에서 “8월 콘서트 행사에서 만나자”는 ‘마에스트로’의 모습이 더 짠했다.

진경준 검사장도 현직 시절 종종 ‘검사 불쌍론’을 꺼냈다고 한다. 검사들이 업무에 치여 경제나 재테크에 좀처럼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게 불쌍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분야를 이해하는 게 수사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역시나 할 말은 아니었다. 정치인들도 불쌍한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 워킹맘 등에게 힘을 보태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산다.

제자리에서 할 일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할 게 뭐 있나. 오히려 불쌍한 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쪽이다. 뭣이 불쌍한지도 모르면서.

김혜미 JTBC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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