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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이 만난 사람] 재임 중 검찰이 주변 조사…노무현, 수모당했다 하소연

중앙일보 2016.07.23 01:02 종합 14면 지면보기
서울 종로구 사직동 앞 아파트 단지에 있는 찻집. 20일 그곳에서 임채정(75)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그의 자택 근처다. 별도로 사무실이 없는 그가 자주 이용하는지 주인은 인터뷰 자리까지 만들어놨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

그는 아직도 열정적이었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점을 조목조목 열거하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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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20일 정치 상황을 “국민 통합도 소통도 되지 않고, 무슨 일을 해결하거나 추진할 수도 없고,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지향점도 사라져 참담한 혼돈 상태”라고 말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남북 분단으로 진보적 가치를 내세울 수 없고, 경제권력이 재벌로 가 있고, 지역갈등, 제왕적 대통령제, 이런 조건들을 합쳐놓으면 한국 정치가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어요. 남북문제는 당장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할 수 있는 게 개헌이고….”

그는 노무현 정부 말 17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해찬 전 총리 등과 함께 1988년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에 입당해 92년 14대 국회부터 서울 노원을과 병에서 내리 4선을 했다.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장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국회의장을 마친 2008년 18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했고, 현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다.
 
2013년 관훈토론에서 현 정부에 주문을 했었죠.
“주문이라기보다… 어려운 한국 정치 지형에서 잘해주길 바란다고 했는데, 속으로는 하나마나 한 소리 한다고 했어요.”
지금 평가해 보면 어떻습니까.
“참담하지 뭐. 참담한 혼돈 상태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이걸 정치라고 할 수 있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지금 되고 있는 게 뭐가 있느냐고. 국민을 통합시킬 수도 없고, 소통도 되지 않고, 무슨 일을 해결하거나 추진할 수도 없고, 아주 지향점도 없어져 버렸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검찰이 시끄러운데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장 때 검찰 개혁 구상은 없었습니까.
“검찰을 밖에서 대통령 의지로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오히려 검찰을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려고 했죠.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지 않도록. 그러면 다 잘 될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당했지.”
노 대통령이 젊은 검사들에게 ‘막가자는 거지요’라고 말한 뒤 입장이 바뀌지 않았나요
“입장이 바뀌진 않았는데… 노 대통령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창피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진 못하지만 검찰로부터 수모를 당한다고. 검찰이 노 대통령을 거의 모욕하다시피 한 분위기였거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모든 권력기관이 독립해 자율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간섭 안 하려고 했다고. 주변에서 갑작스레 풀어준다고 되겠느냐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권력으로부터 떼어놓기만 하면 잘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는 건가요.
“그렇지. 국정원과의 독대도 일부러 안 하고, 권력정치의 유혹을 끊고, 자율성을 부여한 것인데 많은 사람이 우려한 대로 그것이 민주적으로 가는 대신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전횡하는 부정적인 영향이 드러난 것이 아니었던가 반성을 하게 돼요.”
권력기구끼리 서로 견제하게 했어야….
“지금 생각하면 그런 측면도 있었던 거 같은데… 너무 이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결국 나중에 노 대통령을 수사할 때는 배신감을 느꼈겠네요.
“그 전에 이미 몇 번 당했어. 이건 공개된 적이 없는 비밀 얘기지만… 검찰이 그 사이에 대통령 친인척과 지인들까지 수십 명을 넘어 수백 명이라든가, 샅샅이 조사하는 수모를 당했다고. 자기가 그런 꼴을 당했다고 하소연을 하다시피 이야기를 했다고.”
직접 들었나요.
“직접 들은 사람한테 들었지.”
임기 말인가요?
“아니, 임기 말은 아니고 중반 이전일 텐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네.”
그걸 알고도 제지 안 했다는 건가요.
“그분이 집권 이후 가장 큰 과제 중 하나가 권위주의 탈피였어요. 그중 가장 큰일을 권력기구를 대통령이 장악하지 않고 그것을 통치 수단으로 삼지 않는 그런 정치하겠다는 철학이 있었죠 .”
그 구상에 공감하셨나요.
“나는 좀 회의적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될까…. 집권은 했지만 민주정권이라는 것이 정치사회적 기반이 약했잖아요. 검찰이나 국정원이 과연 그렇게 움직일까, 그렇지만 대놓고 반대는 안 했어요.”
인수위원장 때 ‘대북송금에 대해서는 방법이 잘못됐다고 사과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그랬나… 그때 그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어, 사실은. 심각했다기보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고, 무거운 문제였다고. 무엇보다도 여론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정부를 정상적으로 출범하기 어려울 정도의 그런 분위기였다고….”
노 당선자 생각이었나요.
“당선자하고 상의했던 건 생각이 안 나요. 어차피 이것은 한번 풀고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라 그런 얘기가 나온 거 같은데….”
당시 청와대, 동교동 쪽에서 항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아니… 항의나 이런 게 있던 것은 아니고. 동교동 쪽에서는 이 문제가 깊게 안 갔으면 좋겠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생각나는데, 이걸 갖고 구체적으로 요구한다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요.”
이것 때문에 이후 ‘난닝구- 백바지’ 갈등으로 이어진 것 아닙니까.
“노무현 정부하고 김대중 정부 사이에 첫 갈등이 그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상황이 몰리긴 했지만 양쪽이 다 서로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이 문제로 북한하고도 상당히 틀어져서 정상회담을 임기 말에 했죠.
“정상회담은 김정일이 남쪽으로 오는 순서인데 안 와서,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풀어나가느라 늦었지, 대북송금 문제와 연관됐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지금도 남북관계가 꽉 막혔는데.
“남북정상회담 이전보다 더 어려워졌어요. 대통령이 특단의 용기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반도가 어떤 상황으로 치달을지 예측이 안 돼. 솔직히 말하면 불안해. 전에는 남북관계가 나빠졌다 하더라도 그냥 나빠졌다, 그런 정도였는데 지금은 위기의식을 느낀다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명박 정부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야 해요.”
핵 없는 북한과는 달라졌는데.
“그때도 핵실험은 계속 했었죠. 본질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남북이 상호 평화공존할 수 있는 상태로 가야 할 것이고, 평화협정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과 북한의 평화협정을 말하는 건가요.
“미국과 북한은 정전협정의 법적 당사자니까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은 실질적 당사자고, 중국은 참전했으니까 그 4개국이 평화협정을 맺어야 해요. 현재 너무 실타래가 얽혀서, 작은 문제를 해결해서는 풀리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다음 대선을 위해 야권의 과제는.
“후보 단일화가 처음이고 끝이지 사실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야권 후보가 되려면 무얼 더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역시 지금 야당 본거지 호남을 중심으로 한 기존 야당 세력을 어떻게든지 다시 돌이키는 그런 노력이 있어야죠. 정치공학적으로는 그래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능력이나 이미지 이것을 국민들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정치 경험이 일천하니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어떻게 보는지요.
“유명세는 있을 수 있지만 정치조직이나 경험이나 세력이나 이런 것은 없죠. 한국사회를 끌고 나갈 능력이나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줄 기회가 없었다는 게 약점이 되지 않을까요.”
원로들의 개헌 촉구 서명에도 참여하셨는데 개헌 방향은 어느 쪽이신가요.
“개인적으로는 분권형을 선호해요. 한국사회에서는 대통령제에 익숙해 있고, 국민 참여 기회가 제한되면 불만이 있을 수 있죠. 의회에 대한 불신도 심하잖아요. 독점의 폐해를 그동안 뼈아프게 겪어와 어떻든 분권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요.”
문재인 전 대표나 안철수 전 대표가 개헌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근데 문재인 전 대표는 개헌에 대해 열린 자세라고 들었어요.”
 
[S BOX] 14대 총선 때 재검표, 100표 다발 잘못된 것 찾아내 금배지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정치권에 들어간 건 1988년. 87년 직선제 대통령 선거 직후다.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에 실패해 궁지에 몰린 때다.

‘비판적 지지’에 책임을 느낀 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민통련)을 중심으로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집단 입당했다. 이때 임 전 의장도 문동환·박영숙·이해찬 등과 97명이 함께 들어갔다.
 
‘비판적 지지’를 결정할 때 문익환·백기완·계훈제 세 분 의견이 달랐던 것 아닌가요.
“그분들 중심으로 나뉘었던 것은 아니고… 내부 토론을 치열하게 굉장히 많이 했어요.”
후유증은 생각하지 못했나요.
“우리가 신경을 많이 못 쓴 게 그 대목입니다. 또 민통련 결정이 생각보다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어요. 현실적 계산이 약했다는 반성을 해요. 그때만 해도 운동권 논리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단일화가 안 되고 도덕성만 내세우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 고려대 법대를 거쳐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입사 6년 만인 1975년 백지광고 사태 때 동아투위로 해직돼 재야운동을 했다.

13대 총선에서 그는 서울 노원을에 출마해 떨어졌다. 14대 총선 때는 같은 지역에서 재검표 끝에 100표 다발 하나가 잘못된 것을 찾아내 당선됐다. 이때부터 내리 4선을 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열린우리당 당의장 등을 맡았다.

김진국 대기자 kim.jinkook@joongang.co.kr
정리=이지상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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