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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본 배우 호아킨 피닉스

중앙일보 2016.07.23 00:01
우디 앨런(81) 감독의 ‘이레셔널 맨’(원제 Irrational Man, 7월 21일 개봉)은 호아킨 피닉스(42)의 신경질적인 얼굴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연기한 루카스는 명성을 날리는 철학과 교수지만 아주 깊은 우울함에 빠져 있다. 하지만 그의 제자 질(엠마 스톤)은 그런 루카스를 낭만적이라 느끼고,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젊고 아름다운 질을 옆에 두고도 허무함을 달랠 길 없던 어느 날, 루카스를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제 루카스, 아니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에는 점점 광기와 생기가 함께 흐른다. ‘이레셔널 맨’은 우디 앨런 감독 작품 특유의 아이러니와 재치로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수작. 일등 공신은 단연 호아킨 피닉스다. 재미있는 것은 ‘비이성적인, 비논리적인, 불합리한’이란 뜻을 가진 이 영화의 제목이 최근 그가 그린 인물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0여 년간 작정한 사람처럼 상실과 광기와 사랑을 탁월하게 그려 온 그를, 이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 봤다.
 

생기 잃은 남자의 얼굴에 사랑과 집착이 교차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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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레셔널 맨` 스틸컷]

사랑
호아킨 피닉스는 아역으로 시작해 큰 부침 없이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천생 배우다. ‘글래디에이터’(2000, 리들리 스콧 감독)의 악역 코모두스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이후 묵직한 작품들에 연이어 출연한 그는, 탄탄한 경력과 연기력을 가졌음에도 유난히 상복은 없었다.

생기 잃은 남자의 얼굴에 사랑과 집착이 교차할 때


그런 그가 처음으로 비중 있는 상을 거머쥔 영화가 바로 ‘앙코르’(2005, 제임스 맨골드 감독)다. 연기 인생의 큰 분기점이 된 이 영화에서, 피닉스는 미국의 전설적인 뮤지션 조니 캐쉬를 연기해 제63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뮤지컬코미디 부문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는다. 아쉽게도 수상은 못했지만, 제78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피닉스는 어린 시절 형을 잃고 상실감에 고통받는 조니 캐쉬의 우울하고 쇠약한 기운을 호흡 한 숨에도 실어냈다. 그가 표현한 깊은 상실감과 조니의 실제 음악이 어우러지며, ‘앙코르’는 슬프면서도 영롱한 작품이 됐다.

사실 그 절망은 호아킨 피닉스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형 리버 피닉스가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닥친 상실감은, 피닉스의 20대를 내내 짓누르는 아픔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슬픔의 그림자가 짙은 캐릭터, 피폐하고 황량한 얼굴은 ‘앙코르’ 이후 호아킨 피닉스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미쉘(기네스 펠트로)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여자 산드라(비네사 쇼)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남자 레너드로 출연한 ‘투 러버스’(2008, 제임스 그레이 감독)는, 아예 그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약혼녀에게 차이고 죽으려 했던 그는 살아 돌아온 후에도 그 허무함을 주체하지 못해 방황한다.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은 ‘이레셔널 맨’에서도 두드러진다. 이 영화 전반부는 루카스의 우울과 이를 매력으로 느끼는 질의 사랑이 어긋나는 데서 오는 재미를 에너지 삼아 달린다.

피닉스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평소 작품을 까다롭게 고르는 편이지만, 우디 앨런 감독을 무척 좋아해 출연했다. 루카스는 젊은 시절 정치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노력했던 그 어떤 것도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가까운 사람들도 모두 떠나 버리고 만다. 이후 큰 무기력감에 빠지는 인물”이라 설명했다.

광기
소중한 걸 잃은 인간이 제 삶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허무함이 빠져나간 마음은 집착과 광기로 번득이기 시작한다. 루카스는 질과 함께 간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엿들은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것이 아니다. 점차 드러나는 루카스의 광기는 ‘우디 앨런표’ 해학을 통해 정점으로 달려간다.

그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광기 어린 캐릭터는 뭐니 뭐니 해도 ‘마스터’(2012,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프레디다. 극 중 마스터(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표현에 따르자면 프레디는 “정도를 벗어나서 헤매고 있는,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인물.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방황을 멈추지 못하고 늘 술에 절어 산다.

그러다 인간의 심리를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마스터를 만나게 되는데, 두 남자의 관계는 점차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성을 잃고 마스터를 추종하다가도,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고 내달리는 프레디의 모습은 엄청난 흡인력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피닉스를 염두에 뒀다던 앤더슨 감독은 “12년 동안 그와 함께 작업하길 원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항상 적절한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이번엔 제안에 응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라며 전적인 신뢰를 표했다. 피닉스는 이 작품으로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프레디만큼이나 광기 어린 인물인 ‘이민자’(2013,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브루노는 어떤가. 1920년대 미국으로 건너온 가난한 유럽 여성들을 착취해 먹고사는 그는, 에바(마리옹 코티아르)에게 한눈에 반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집착을 보인다.

피닉스를 거듭 지켜볼수록 놀라운 것은 그가 인물의 광기를 표현하기 위해 몸을 쓰는 방식이다. ‘마스터’ 속 프레디의 피폐함은 피닉스의 비쩍 마른 몸, 어깨를 구부린 채 위태롭게 걷는 걸음걸이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극장에서 여성들과 함께 화려한 쇼를 진행하는 브루노(이민자)의 현란한 몸짓 속에 프레디는 없다.

‘이레셔널 맨’에서 그는 루카스를 연기하기 위해 부러 15㎏을 찌웠다. 말은 늘 번드르르하게 하지만 실제 행동은 다른, “재치 넘치고 그럴듯한 논쟁을 벌이지만, 그 실체를 파고들어가면 논리가 서지 않는 인물”(우디 앨런 감독)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피닉스가 완벽한 연기에 품는 집착은 자신이 연기한 인물들 못지않다. 그는 작품을 고르는 데 까다롭기로 소문난 배우다. 어마어마한 출연료와 전 세계적 유명세가 보장될 게 뻔한 마블 수퍼 히어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10월 개봉 예정, 스콧 데릭슨 감독)의 주인공 역할을 제안받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제작진과 내가 생각하는 캐릭터가 너무나 달랐다”(영국 잡지 ‘타임아웃’과의 인터뷰)는 게 이유였다. 결국 ‘닥터 스트레인지’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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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레셔널 맨` 스틸컷]

사랑
피닉스의 인물들이 그토록 집착하고 광기를 내보인 대상은 주로 사랑하는 여성이었다. ‘앙코르’를 볼까. 조니는 동료 가수 준 카터(리즈 위더스푼)에게 반해 시도 때도 없이 청혼한다. 무려 마흔 번의 구애 끝에 결국 해피 엔딩에 이른다. 그는 집착에 가까운 사랑에 빠진 조니를 연기하기 위해 라이브 공연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노래를 직접 부르는 열의를 보였다.

상대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완벽하게 조니가 된 피닉스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찬사를 늘어놓은 이유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만 같은 사랑. 피닉스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레너드(투 러버스)는 미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바보처럼 그 주위를 맴돌고, 브루노(이민자)는 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길 잃은 강아지처럼 끙끙댄다.

그중 ‘그녀’(2013, 스파이크 존즈 감독)야말로 피닉스가 내놓은 사랑 연기의 진수가 담긴 영화다. 그가 연기한 테오도르는 절절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구입한 인공지능 컴퓨터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목소리 출연)와 사랑에 빠진다. 상대 배우 없이 오로지 컴퓨터와 나누는 사랑으로 관객을 웃기고 울린 이 영화는, 테오도르의 공허한 눈빛이 점점 생동감으로 차오르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다양성 영화로 개봉해 국내에서만 약 35만 명의 관객을 그러모은 힘은 거기에 있었다. 피닉스는 할리우드 명배우로서 연기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그가 철저한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애호가라는 사실은 꽤 잘 알려진 일.

1990년대 프라다 광고 촬영 때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지 않겠다는 주장을 관철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국제사면위원회(인권 옹호를 위한 국제적 민간 조직) 등에서도 활동하는 소신 있는 활동가다. 그의 차기작은 ‘케빈에 대하여’(2011)로 이름을 알린 린 램지 감독의 ‘유 워 네버 리얼리 히어’와 예수 역할을 맡은 ‘메리 막달렌’(가스 데이비스 감독)이다.

제임스 그레이, 스파이크 존즈, 폴 토마스 앤더슨을 거쳐 우디 앨런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함께 작업해 온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은 또 어떤 상실과 광기와 사랑을 그리게 될까.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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