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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소년, 영감이 되다

중앙일보 2016.07.20 00:34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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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검찰청·법원에는 진화를 멈춘, 아메바 같은 화석생물이 살고 있다. ‘영감’이라는 호칭이 그중 하나다. 검찰청 주변에서 “우리 영감이 똥오줌 못 가려서 피곤하다”는 말이 들려오면 화자가 고령인 부친에 대해 불경스러운 발언을 하고 있다고 단정하지 않는 게 좋다. “ 검사가 사리 분별을 못해 쓸데없는 일이 많다”는 검찰 직원의 푸념일 가능성이 크다.

검찰청·법원에서 상대를 직접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일은 한 세대 사이에 급격히 줄었다. 하지만 검사가 없는 자리에서 3인칭 존칭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여전히 존재한다. 시중에서는 ‘영감님’이 ‘어르신’으로 거의 흡수돼 버렸다. 높임말 기능이 사라져 “아니, 이 영감이…”에서처럼 비난의 느낌을 주려 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세상과 법조계는 이처럼 언어 생태계조차 다르다.

영감(令監)은 조선시대에 정삼품·종이품 관직을 맡은 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대감(大監) 바로 아래였다. 영감은 판사·검사·군수에 대한 호칭으로 일제시대를 거쳤고, 원시 형태를 간직한 채 검찰청·법원에서 종족 보존을 하고 있다.

‘소년등과(少年登科)’라는 말도 살아 있다. 일반 관청에서도 종종 발견되지만 ‘소년급제(少年及第)’라는 사촌과 함께 주로 검찰청·법원에서 서식한다. 통상 대학 졸업 전(군 복무를 하지 않은 상태로)에 고시에 합격한 이를 칭송하는 데 쓰인다. “이분이 소년등과하신 분이다”가 대표적 용례다.

진경준 검사장은 스물한 살(대학 3년) 때인 1988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듬해에는 행정고시에도 붙었다.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한 뒤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검사 2년차 때 6000원에 산 기차표를 1만원에 판 회사원을 구속해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진 검사는 “부당 이득을 취한 나쁜 범죄인”이라고 구속 사유를 설명했다.

진 검사장 사건에서 튄 불똥 때문에 논란에 휩싸인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스무 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을 거쳐 3년 뒤에 영감님이 됐다. ‘개·돼지’ 발언으로 삭탈관직된 나향욱씨도 스물셋에 행정고시에 붙어 ‘신분’이 달라졌다. 가수 아이유가 ‘난 영원히 아이로 남고 싶어요’라고 노래(‘스물셋’)하는 나이다.

청년들이 영감이 돼 세상을 호령하다 추락하고 있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게 되자 더 높은 곳을 향해 욕심을 부렸고, 결국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진 이카로스가 생각난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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