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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27호 대원 과제 459페지 35번…” 평양 라디오 돌연 난수방송

중앙일보 2016.07.19 01:29 종합 18면 지면보기
북한이 15일 새벽 남파 공작 지령용 난수(亂數) 방송을 돌연 내보냈습니다. 대남매체인 평양방송을 통해 다섯자리 숫자를 잇달아 부르는 방식으로 12분간 방송했다는건데요.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말 중단했던 걸 본격 재개하는 것 아니냐며 관계당국은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합니다.

15일 자정 12분간…16년 만에 재개
장기은둔 공작원 깨우는 지령이나
사드 논란 틈탄 심리전일 수도
최근 대남공작도 디지털로 진화
첨단 ‘스테가노그래피’로 암호화
사진·음악파일에 기밀정보 숨겨

이번 방송은 정규 보도를 마친 0시45분부터 57분까지 이어졌는데요. 여성 아나운서는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을 위한 원격교육대학 수학 복습과제를 알려드리겠다”고 예고한 뒤 숫자를 읽어내려갔습니다. “459페지(쪽) 35번, 913페지 55번, 135페지 86번...” 식인데요. 미리 약속한 특정 책자의 페이지와 글자 위치를 의미한다는군요. 이를 조합해 지령 내용을 파악한다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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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수’란라는 낯선 표현은 우리 일상에서 종종 쓰입니다. 뭔가 복잡하게 얽히거나 까다로운 일에 ‘난수표 같다’는 말을 쓰곤하죠. ‘27호 대원’은 무엇을 탐사하러 남한 땅에 온 건지, 27호라면 도대체 몇명이 활동 중이란 애기인지 궁금증이 커지는데요.

난수는 본래 무작위로 뽑아낸 숫자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첩보전 세계에선 정교하게 짜여진 숫자의 배열로 둔갑하죠. 노출이나 의미 파악이 어렵도록 하기위해 5개 안팎의 숫자로 방송 한 뒤 이를 풀어내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13524’라고 하면 135쪽 24번째 글자(혹은 24번째 행 첫글자)를 의미합니다. 2006년 검거된 한 공안사범은 톨스토이의 고전 ‘부활’을 암호해독용 책자로 사용해 화제가 됐습니다. 어휘가 다양한데다 의심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택했다는 게 당시 수사 관계자들의 귀띔입니다.

숫자를 이용한 암호 방식은 고대 로마에서도 쓰일 정도로 역사가 깊습니다. 난수방송은 국제 첩보전에서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되는데요. 영국 비밀정보 기관이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링컨셔 포처(The Lincolnshire Poacher)는 초강력 단파 난수방송의 대명사입니다. 키프로스 영국 공군기지에서 발신되며 여성 목소리로 숫자 5개를 부르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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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혐의로 1992년 구속된 김낙중씨는 난수방송 해독에 필요한 난수표를 한약병에 숨겨 보관했다. [중앙포토]

대북정보를 다뤘던 전직 요원은 “난수표는 간첩 또는 첩보원 신분이란걸 노출하는 결정적 증거라 가장 민감한 품목”이라고 말합니다. 1996년 9월 강릉 침투 북한 잠수함 승조원들이 탈출 직전 제일 먼저 불태운 것도 난수표였다는군요. 상대 수중에 흘러들어가면 현재는 물론 과거의 공작활동까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겠죠.

그 활용 또한 워낙 다양해 첩보전에선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존재”라고 불린다고합니다. 같은 난수표도 홀수 날짜에는 가로에서 세로로 해독하고, 짝수날에는 숫자에서 전부 1을 뺀 뒤 조합하는 등의 규칙이 부여된다는 겁니다. 음악 등을 결합해 중요도를 사전에 알리기도 한다는 데요.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가 나오면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이거나 알맹이가 없는 기만용 방송이고, 혁명가요가 울리면 실제 지령이 떨어지는 등의 수법이란 설명입니다. 방송을 한두차례 되풀이하는 건 검증을 위한 것이라는군요.

첩보전도 인터넷과 SNS, 첨단 기술 등에 힘입어 진화를 거듭해왔습니다. 북한의 대남 공작도 예외는 아닌데요. 간첩 검거 발표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던 무전기와 모스부호 송신기, 공작금 달러뭉치, 독침 등은 옛말이 된듯합니다.

최근 관계당국에 적발된 ‘PC방 간첩’은 인터넷 공간을 이용한 비밀통신과 관련이 깊어보이는데요. 요즘엔 최첨단 암호화 프로그램인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를 사이버 공간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기밀정보를 동영상이나 사진·음악 파일 안에 암호로 숨겨 놓는 방식인데요. 치밀하게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아 우리 수사기관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방식으로 돌아간듯한 갑작스런 난수방송이 뭘 겨냥한건지 현재로선 불투명합니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배치 논란을 틈탄 테러·선동인지, 단순 심리전인지 말입니다. 정부 당국자는 “5년 혹은 10년 이상 장기 은둔해온 공작원을 일컫는 ‘슬리핑 에이전트(sleeping agent)’를 깨우려는 지령일 수도 있다”고 귀띔합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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