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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왈리드·판빙빙도 초상화 그려달라 요청”

중앙일보 2016.07.12 01:27 종합 2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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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우 교수는 “주변의 소중한 것들과 사람을 주제로 마음을 울릴 작품을 만들겠다”고 했다. [사진 오상민 기자]

지난 5월 방한한 세계적 부호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림 한 점을 챙겼다. 전용기에 실려 조심스럽게 운반된 그림은 그의 초상화(사진)였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종이를 태워 만든 수많은 구멍으로 왈리드 왕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길우 중앙대 한국화과 교수
향불·인두로 한지 태워 그림 제작
“마른 낙엽에 비치는 햇빛 보고 착안
동양적 아름다움 표현하는 데 제격”

이 특별한 작품을 제작한 사람은 ‘향불 화가’로 알려진 이길우(49) 중앙대 한국화과 교수다. 그는 “왈리드 왕자가 우연히 영국의 한 갤러리에 전시된 내 작품을 보고는 향이 타고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희생 정신’을 떠올렸다고 말하더라”며 “자신도 국민을 위해 희생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며 직접 초상화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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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리드 왕자 초상

알 왈리드 왕자뿐 아니라 중국의 유명 여배우 판빙빙 등 유명인들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는 이 교수는 향불이나 인두로 한지를 태워 수많은 구멍을 만드는 ‘향불 기법’으로 일찍이 해외에서 유명세를 얻었다.

2004년부터 중국 베이징, 미국 시카고, 영국 런던, 독일 뮌헨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0년엔 아시아 최고(最古) 비엔날레인 방글라데시 비엔날레에서 대상도 수상했다. 그는 “향불과 한지가 주는 동양적인 느낌과, 엉뚱해보이는 두 소재가 조화를 이루는 점에 특히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그이지만 작가로서의 삶이 평탄치만은 않았다. 학창시절 “미술은 절대 안 된다”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먹 냄새에 반해 중앙대 한국화과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미술 공부를 계속 하며 작가의 삶을 살았다. 결혼 뒤에도 10년간 수입이 일정치 않아 부인이 가장 역할을 해야했다. “아내가 속옷 가게를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어요. 아무런 불평 없이 묵묵히 작품 활동을 응원을 해준 고마운 사람이죠.”

향불 기법을 고안해낸 건 2003년 늦가을, 우연히 하늘을 쳐다봤을 때였다. 말라가는 낙엽이 햇빛에 반사되면서 마치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보고는 향을 떠올렸다. 이후 오랜 연구 끝에, 두 장의 한지에 향불로 구멍을 내 각기 다른 그림을 완성한 뒤 풀로 배접하는 기법을 터득했다. 이후엔 연필 모양의 작은 인두로 깔끔하게 구멍을 뚫는 인두 기법도 고안했다.

향불 기법은 향으로 수만 개의 구멍을 일일이 뚫어야하기 때문에 최소 2개월의 제작기간이 필요하다. 향 냄새에 머리가 아파 한약재로 만든 향을 따로 주문해 사용하고있다. 한지가 얇아 잘못 태우면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해야한다. 하지만 그는 “향불은 동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장 의미있는 작품으로 2003년 제작한 ‘화가의 가족’을 꼽았다. 향불 기법을 사용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를 가장으로 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담겨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주변의 소중한 것들과 사람을 주제로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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