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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줬다" 공여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사건…9억 한명숙 유죄, 5000만원 전 공직자 무죄

중앙일보 2016.07.09 00:17 종합 17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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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A씨는 검찰에서 “공직자인 B씨에게 4~5년 전, 3~4회에 걸쳐 돈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돈을 건네는 장면을 본 사람은 없고 폐쇄회로TV(CCTV)에도 걸리지 않았다. A씨의 진술이 유일한 직접 증거다. 다만 이 돈을 조성하는 데 이용된 비자금 계좌는 확인됐다.

[뉴스 속으로] 법관 따라 유·무죄 갈리는 금품수수 판결
“진술 신빙성 판단은 법관의 자유” 원칙
법원, 금품수수 별건수사 관행에 제동
박지원·조현오 등 무죄 판결 잇따라
검찰 “부정부패 수사하지 말란 얘기”

“B씨에게 돈을 줬다”고 실토하기 전 A씨는 다른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어렵게 “돈을 줬다”고 말했지만 수차례 진술하면서 돈 전달 방법 등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달라졌다.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B씨에겐 유죄가 선고됐을까, 무죄가 선고됐을까.

지난해와 지난달 대법원은 두 개의 다른 결론을 내놨다.

B씨에 한명숙(72) 전 총리를 대입하면 유죄, 진모(61) 전 관세청 국장을 넣으면 무죄였다.

한 전 총리 사건에서 A씨인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는 1심 법정에서 “돈을 준 적이 없다”고 진술을 번복했고, 진 전 국장 사건에선 핵심 증인이었던 관세청 공무원 윤모씨가 “B씨(브로커 이동찬)는 진 전 국장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고 진술을 바꿨다.

한 전 총리의 세 번에 걸친 9억원의 금품수수 혐의를 유죄라고 본 대법원의 논리 전개를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 한 전 총리의 비서가 현금 2억원을 한씨에게 돌려줬다. 한씨의 동생이 한씨의 1억원짜리 수표를 전세자금으로 썼다 ▶ 비서나 동생이 한씨에게 돈을 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한 전 총리가 3억원을 받은 것이다 ▶ 따라서 나머지 6억원에 대해서도 “줬다”는 한 전 대표의 검찰 진술이 “안 줬다”는 법정 진술보다 믿을 만하다.

반면 네 차례에 걸쳐 5000만원과 양주 등을 받았다는 진 전 국장의 혐의 전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논리 전개는 반대였다.

- 2007년 3월 20일 브로커 이씨가 출국심사대를 통과하고 이씨가 탑승한 비행기가 탑승교에서 분리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18분뿐이다->따라서 이날 공항 내 환승호텔 커피숍에서 500만원을 줬다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다른 증거가 없는 한 나머지 세 차례 돈을 건넸다는 진술도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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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여자 진술 믿을 땐 신중”…믿을지 말지는 법관의 자유=두 판결 중 2000년 이후 대법원 판례의 대세에 따른 건 후자다. 대법원은 2002년 박종진 전 경기도 광주군수 뇌물 사건에서 “수사나 재판이 진행 중이거나 임박한 자신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동기가 있는 금품 공여자의 진술은 쉽게 믿을 수 없다”는 뜻을 처음 공식화했다.

뇌물 사건에서 출발한 이 법리는 2009년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의 알선수재 혐의에 대한 상고심을 기점으로 모든 금품수수 관련 사건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수차례의 금품수수 사실 중 한 건에 대한 공여자 진술의 신빙성이 무너지면 나머지 진술도 믿을 수 없다는 법리가 나온 것도 이때다.

별건 수사에 이어 금품 공여자와의 모종의 거래에 기대 온 검찰의 특수수사와 “입구가 있으면 출구도 있다”는 식의 기소 관행에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최근 저축은행들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와 부산의 중견 건설업체 대표로부터 5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그러나 한 전 총리가 유일한 예외는 아니다. 지난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로부터 징역 8월을 선고받은 이완구 전 총리 사건도 유사한 구조다.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도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 왔고, 돈을 주고받은 것에 대한 직접 증거는 성 전 회장이 죽기 전 모 일간지 기자에게 남긴 전화 통화 내용이 전부였다. 2013년 4월 4일 두 사람이 독대했다는 점과 돈의 출처로 추정되는 비자금 조성 내역들은 확인됐지만 관련자 진술이 오락가락해 돈의 포장이 ‘비타500’ 상자냐 쇼핑백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1심 판결문에서 대법원이 천명해 온 ‘수사받는 금품 공여자의 진술에 대한 판단의 원칙’은 발견되지 않는다.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에서 피고인들의 운명이 갈리는 건 자유심증주의(형사소송법 308조)라는 대원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어떤 증거를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건 기본적으로 재판의 전 과정을 이끌어 온 법관의 자유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논리와 고도의 개연성을 벗어나 심증을 형성하면 안 되는 건 당연하다”며 “다만 판사도 사람이라서 여론과 피고인의 인간됨 등에 영향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줄무죄에 불편한 검찰=지난달 23일 협력업체 등에서 금품을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기소됐던 KT&G 민영진 전 사장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자 검찰은 발끈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공여자가 검찰에서 한 자백을 법정에서 유지하는 사안에서도 이런 식으로 무죄가 선고되면 사실상 부정부패 수사는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처벌 모면이나 경제적 이익 보호가 아닌 순수한 동기에서 뇌물을 줬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법원의 변화에 대응해 검찰은 그동안 자신이나 타인의 범죄 사실을 털어놓은 사람의 범죄 혐의에 대해선 선처하는 플리바게닝이나 사법협조자 형벌 감면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입법엔 실패했다. 법원과 학계의 우려가 작용한 결과다. 법원 관계자는 “기소 여부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의 재량에 맡기는 체계에서 플리바게닝을 허용하면 검찰 수사의 투명성 문제가 더 심각하게 대두될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대법 “성욕 충족도 뇌물”…피의자와 성관계 검사 징역형

2012년 11월 법조계에선 한 젊은 검사가 절도 혐의 피의자와 집무실에서 성관계를 맺은 사건이 화제였다. 엽기적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법적 쟁점도 흥미로워서다. ‘성욕 충족’도 뇌물이 될 수 있을까. 대법원은 “뇌물이란 재산적 이익뿐만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체의 유·무형의 이익”이라는 정의에 따라 “‘성욕 충족’도 뇌물”이라고 결론 냈다. 문제의 검사에게는 징역 2년형이 확정됐다.

재산적 이익의 경우 꼭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도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 등이 인정되면 폭넓게 뇌물로 인정된다. 돈을 빌려주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 리스 차량을 제공하는 것, 상대방이나 자녀들의 취직 자리를 알선해 주는 것도 뇌물이라는 판례가 있다.

뇌물로 쓰인 물건은 시대상도 반영한다. 1969년 육군 중령 김모씨는 부하에게 냉장고 1대를 뇌물로 받았다. 당시 전국에 보급된 냉장고는 5만여 대가 전부였다. 자동차가 대중화된 90년대부터는 자동차가 뇌물로 오갔다. 2000년대 이후엔 골프채를 받거나 그린피를 대납시킨 공무원들이 뇌물죄로 처벌되곤 했다. 부동산은 단골 아이템이다. 방법은 70~80년대 땅문서를 주고받던 것에서 90년대 이후 주택조합에 이름을 올려 프리미엄을 취하거나 분양권을 얻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임장혁·정혁준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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