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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경, 시각장애인 눈 돼 100권 소설 녹음…최미혜, 19개 언어 24시간 전화 통역 서비스

배혜경, 시각장애인 눈 돼 100권 소설 녹음…최미혜, 19개 언어 24시간 전화 통역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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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부산시 사상구 점자도서관에서 만난 배혜경씨는 “ 계속해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책을 읽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송봉근 기자]

“이 큰 나무가 새파란 잎을 달고 있으니, 이 나무는 젊은 나무요, 늙은 나무요?”

[연중기획] 매력시민 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나무는 늙은 나무들도 젊은 잎을 틔우니까 한 그루 안에서 늙음과 젊음이 순환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것이지요.”(김훈 『내 젊은날의 숲』 중)

낭랑한 목소리가 한 평 남짓한 녹음실을 가득 채운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부터 책 맨 뒤 발행일과 출판사를 읽을 때까지 흔들림 없는 목소리. 수필가 배혜경(50)씨다.

| 청각도서 녹음 봉사 수필가 배혜경
로맨스·추리물 등 다양한 장르 읽어
도서관 부스에서 홀로 책 녹음
시각장애인 상대 독서교육도 진행

배혜경씨는 2001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한 청각 도서 녹음 봉사를 해 왔다. 2001년부터 3~4년을 봉사했고 잠깐의 공백 후 2008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주도 쉬지 않고 책을 읽어 왔으니 10여 년을 시각장애인들의 눈으로 살아온 셈이다.

배씨가 10년간 녹음한 책은 100권이 조금 넘는다. 앤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 마광수 『즐거운사라』, 클라우스 헬트 『지중해 철학기행』,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길리언 플린 『나를 찾아줘』 등 역사·철학·에세이·소설을 두루 읽었다. 배씨는 “처음에는 독자들이 편안한 에세이나 시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로맨스 소설, 추리물을 신청하는 독자가 많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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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배씨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와서 부스에 자리를 잡고 홀로 책을 읽는다. 차비도 식사도 자비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독자 생각에 한 번도 지겹거나 힘들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녹음할 때 앞뒤로 ‘낭독자 배혜경입니다’라고 소개하는데 그걸 기억한 독자가 ‘이 책은 배혜경 선생님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직접 신청할 때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책은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정비석의 장편소설 『산유화』(1959년)다. 신청자는 60대 남성. 그는 “젊었을 때 한 여성이 읽어줬던 책인데 다시 듣고 싶다. 절판돼 동네 헌책방을 다 뒤졌고 3000원짜리 책을 1만원 주고 샀다”고 신청 사유를 남겼다. 배씨는 “책을 읽으며 신청자의 젊음·사랑의 기억에 감정이입을 해 울컥했다”고 말했다.

배씨는 지난 3월부터 8주간 10명의 시각장애인을 상대로 독서교육도 진행했다. 50세가 넘어 시력을 잃은 83세 할머니, 실험실에서 화학물질이 폭발해 시각을 잃었다는 60대 중반의 남성, 배씨의 낭독을 열심히 들었다는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모였다. 부인이나 봉사자의 손을 잡고 오는 회원, 직접 시를 써오는 회원도 있었다. 배씨는 "시각을 잃으면 청각이나 촉각 등 연결된 다른 감각도 무뎌지게 마련”이라며 "강의를 듣기 위해 온 감각의 촉수를 내게 기울이는 회원들에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꾸준히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고 싶다”며 “작가 정유정의 신작 『종의 기원』을 읽으려는 생각에 들떠 있다”고 말했다.

| 사단법인 bbb코리아 사무국장 최미혜
교수부터 주부까지 4600명 참여
2002년 월드컵 때 서비스 시작
해외서 전화통역 서비스 자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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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혜 bbb코리아 사무국장은 “통역서비스를 통해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했다. [사진 오종택 기자]

배씨가 부산에서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돼 주듯 서울 이태원에는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의 입과 귀가 돼 주는 통역 봉사자들이 있다. 그것도 휴대전화를 통해서다. 한·일 월드컵 열기가 한창이던 2002년.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위해 23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모였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들이 응급상황에 처할 경우를 대비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현재 19개 외국어로 24시간 휴대전화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단법인 bbb코리아가 이렇게 시작됐다.

통역 봉사를 하겠다고 선뜻 나선 이들은 전직 외교관부터 교수·학생·가정주부까지 각계각층이었다. 휴대전화를 활용한 통역 서비스의 특성상 이들은 월드컵 기간인 약 2개월간 사실상 24시간 통역 대기상태로 지내야 했다. 한밤중이나 새벽까지 택시기사, 술집 종업원, 호텔 직원 등과의 통역을 요청하는 외국인들의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bbb코리아는 월드컵 기간 13개국 언어로 2만여 건의 통역 서비스를 무사히 끝마치며 큰 호응을 얻었다. 최미혜 bbb코리아 사무국장은 2002년 당시를 회상하며 “통역 서비스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사는 두 사람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했다. 특히 길을 잃거나 크게 다치는 등 응급 상황에 놓인 외국인들이 최소한 언어 문제로 곤란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월드컵 같은 대형 행사뿐 아니라 일상 곳곳에서도 통역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특히 당시 휴대전화가 보급되던 시기였으니까 전화통역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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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봉사’에 대한 믿음은 일회성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bbb코리아가 이듬해 5월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한 원동력이 됐다. 특히 2003년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5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관광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bbb코리아라는 이름은 ‘before babel brigade(바벨탑 이전 시대의 군단)’라는 표현에서 따 왔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던 바벨탑 이전 시대처럼 세계인들이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현재 통역 자원봉사자는 4600명에 이른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기능적인 측면 이외에도 정서적·감정적 교류가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bbb코리아가 통역 서비스를 통해 세계인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을 꿈꾸는 이유입니다.”

bbb코리아는 최근엔 ‘나눔을 실천하는 언어·문화 비영리단체(NGO)’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외국어 통역 서비스에 더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해외에 한국어학당을 운영하고 있다. 현지인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과의 관광·문화 사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다.

최근엔 해외에 전화통역 서비스인 ‘bbb운동’을 전수하고 있다. bbb코리아의 자문으로 2014년엔 월드컵 개최국인 브라질에서 ‘리오 아미고(Rio Amigo·여행의 동반자이자 친구)’라는 이름으로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 등 7개 언어의 전화통역 서비스가 이뤄지기도 했다. 최 사무국장은 “국가·인종·문화에 상관없이 전 세계인이 소통하는 문화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는 게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글=채윤경·정진우 기자 pchae@joongang.co.kr
사진=송봉근·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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