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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아베의 미국, 박근혜의 일본

중앙일보 2016.07.07 00:55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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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
논설위원

형만 한 아우 없고 전편만 한 속편 없다. 영화든 운동선수의 시즌 성적이든 속편이 성공한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건 힘들다. 그래서 ‘소포모어(sophomore=2년차) 징크스’란 말이 나왔다. 아버지 이름값을 넘어서려는 2세 정치인들 중엔 그런 부담감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힐러리의 힘겨운 대선전이 그런 모양새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남편인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56%인데 정작 힐러리 자신은 44%다. 선거 참모들은 부부 합동유세를 말리는 중이다. 태양 옆에선 빛나기 어렵다는 논리다. 그래서 힐러리 옆자리엔 어제 오바마가 섰다.

급증하는 2세 정치인이 아버지 꿈 완성하려면
수단·행태의 단순 모방 벗어나 새 길 찾아내야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할 때 『미국의 정치 명문가』란 책을 쓴 스티븐 헤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인터뷰했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세습 정치인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디어 관심이 큰 데다 부모의 정치기반이 후원금 마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란다. 한국에서야 아직도 ‘그 좋은 자리를 대를 물려 가며…’라고 눈을 치켜 뜨는 사람이 많지만, 우리 정치판에도 어느새 아버지 후광을 업은 주니어 금배지가 12명이다. 대통령 외에 집권당 원내대표, 금배지 뗀 경제부총리까지 있으니 당·정·청의 중심이다.

세습 정치가 흐름이라면 1세보다 흥행이나 완성도를 높인 2세가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베 총리는 성공 사례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일본 참의원 선거는 ‘아베 대승’의 예상이 많다. 결과마저 그러면 일본은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마저 바꿀 가능성이 열린다. ‘영혼의 멘토’인 외할아버지 기시 전 총리가 이루지 못한 꿈이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인 기시는 “평화헌법을 바꾸는 게 일본의 진정한 독립”이라고 믿었다. 종속 국가가 아닌 대등한 미·일 관계 복원이다.

중요한 건 기시와 기시를 계승한 아베가 꿈을 향해 걸어가는 방식이다. 10년 전 처음 총리에 올랐을 때 아베는 거의 혈기왕성한 반미주의자였다. 부시의 아시아 푸들로 불린 전임자 고이즈미 총리와 달리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되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태평양전쟁은 제국주의 미국과 제국주의 일본이 서로의 이익을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니, 미국이 패자를 극악한 전범으로 처형한 건 부조리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2012년 재집권한 아베는 친미주의자로 태도를 180도 바꿨다. 미국 품에 안겨 일본 총리론 처음 미 상·하원 합동연설 무대에 섰다. 링컨의 애칭인 ‘에이브(Abe)’와 성이 같다며 미국에 다가섰다. 아베와 아베 실각 후 하토야마 정권이 보여준 반미 스탠스에 놀란 미국이 도요타자동차 리콜로 힘을 보여준 뒤다.

청와대가 어제 한·일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 일본 언론 보도를 부인했다. 굳이 부인까지 한 걸 보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강한 모양이다. 위안부 문제가 강경 입장의 배경이라는데 그럴 거면 지난 연말 위안부 협상엔 왜 합의 도장을 찍었는지 모를 일이다. ‘불가역적’ 때문에 그렇게 큰 박수를 받지도 못한 합의안이다. 어차피 이웃인 한·일 두 나라 간엔 북핵 공조 등 시급한 현안이 산더미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이런 식의 담쌓기가 계속되면 일본 내 친한파, 지한파의 입지가 좁아지고 끝내는 떨어져 나갈 게 뻔하다는 이치를 청와대가 모를 리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재집권 사흘 뒤 당선됐다. 두 사람 모두 선대에서 못 이룬 과업, 유훈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지만 3년 반이 지난 지금 두 정치인은 처지가 많이 다르다. 기시가 그린 대미 자주와 협력의 이중주는 아베의 친미주의 행동 계획에 따라 착착 진행됐다. 대등한 미·일 동맹이 그야말로 코앞이다. 하지만 일본을 뛰어넘겠다는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꿈은 아직 먼 길이다. 관건은 원대한 꿈이고, 꿈을 위한 새 길이다. 친미나 반미는 수단이다. 친일이나 반일도 마찬가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뿔테 안경에 머리칼을 뒤로 넘겨 따라 한다고, 김일성의 꿈이 북한에서 이뤄질 리 있겠는가.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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