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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좋은 사전을 갖고 싶다

중앙일보 2016.07.07 00:48 종합 3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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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

실상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종이사전의 오늘이 그렇다. 통계청이 최근 소비자물가지수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종이사전을 462개 조사 품목에서 제외했다. 사전이 소비생활 대표 종목에서 빠진 건 45년 만의 일이다. 지금까지 사전이 포함됐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제외 사유는 명확하다. 지난해 월평균 소비지출액이 231원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에센스(ESSENCE)’ 시리즈로 유명했던 민중서림 고명수 편집위원과 전화로 만났다. 1984년부터 국어사전·한자사전 편찬에 참여해 온 베테랑이다. “10여 년 전 한 해 30만 부 가까이 나갔던 영한사전은 요즘 2만 부 정도 나가요. 이런 상황에 누가 사전을 새로 찍겠습니까. 낡은 사전을 쓰지 않겠다는 여론이 들끓으면 모를까요. “『에센스 국어사전』은 2006년 이후, 『에센스 영한사전』은 2013년 이후 개정판이 중단된 상태다.

정부기관은 사정이 좀 나을까. 국어사전의 대명사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99년에 마지막 판이 나왔다. 요즘엔 온라인에서 수정 사항을 제공하고 있다. 올 10월께 기존 50만 어휘에 새로 50만 단어를 추가한 ‘우리말샘’ 서비스를 개통한다지만 종이사전의 질감에 비교할 일이 아니다. 국립국어원 정희원 어문연구실장은 “99년 당시 90여 명에 달했던 편찬인원이 요즘엔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했다. 전문성 저하가 우려된다.

종이사전의 위기는 2000년대 초반 포털 사이트가 사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시작됐다. 스마트폰으로 궁금한 단어를 손쉽게 검색하는 시대, 누가 두꺼운 사전을 손에 침을 발라 가며 찾겠는가. 초창기 조악했던 온라인 사전도 시간이 가면서 체계가 다듬어지고, 참여 기관 또한 늘면서 품질이 몰라보게 향상됐다. CD롬 사전, 전자사전도 구시대 유물이 됐다. 그런 시점에 종이사전 운운은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사전의 가치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신간 『검색, 사전을 삼키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네이버·다음에서 14년간 웹사전을 만들었던 저자 정철씨는 종이사전을 변호한다. “검색이 좋아지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지식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사전은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벽돌이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믿고 이용하는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사전진흥법마저 제안한다. 문제는 돈이요, 의지다. 좋은 사전 없는 문화 융성, 자칫 헛구호가 될 수 있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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