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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성폭행 덮으려다 역풍 맞은 국민당

중앙선데이 2016.06.26 00:30 485호 28면 지면보기

일본 패망 이후, 중국의 대도시에는 이런 모습이 흔했다. 1946년 12월, 상하이. [사진 제공 김명호]



민심은 변덕이 심하다. 사춘기 여자애들보다 더하다. 항일전쟁(1937~1945) 초기 국민당의 지배력은 확고했다. 3년이 지나자 민심이 국민당을 떠났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83-

1939년 가을, 한 시인이 감찰위원 류청위(劉成?·유성우)의 분노를 일기에 담았다.



“중국 민족이 망한다면 국민이 우매해서가 아니다. 모든 원인은 정부 때문이다. 감찰을 받아야 마땅할 놈들이 감찰한답시고 눈알 부라리다 보니, 정부의 감찰 기능이 완전히 마비됐다. 중국인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의 뜻이라며 체념한다. 국민정부가 망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뜻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感情)이지 이성(理性)이 아니다. 국민당은 국민의 감정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개(狗)민당 소리 들을 날이 멀지 않았다.”



 

중국에서 철수하는 미군. 1947년 봄, 칭다오(靑島)인근. [사진 제공 김명호]



미군의 중국인 폭행은 선충(沈崇·심숭) 사건 전에도 있었다. 46년 9월 22일 밤, 상하이 황푸탄(黃浦灘)에서 인력거꾼과 미군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코를 물어뜯긴 미군은 인력거꾼의 정수리를 후려 갈겼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3개월 후에 벌어진 선충 사건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중국인들은 인명재천(人命在天), 사람의 수명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며 담담했다. 파장이 크지 않다 보니 미국 신문도 가볍게 다뤘다. “중국은 사람이 워낙 많다. 1000명 사망은 숫자에 불과하고, 한 명의 비명횡사는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난다. 모욕을 당해도 낯빛이 변하지 않는 민족이다.”



국민당 정보기관은 선충에 대한 악소문을 퍼뜨렸다. “대학생이 아닌, 밤마다 미군부대 주변을 서성이던 거리의 여자다. 성폭행했다는 미군과는 원래부터 친구 사이다. 경찰이 달려갔을 때 미군이 ‘이 여자는 내 친구니 상관 말라’고 했다. 자칭 여대생이라는 여자도 미군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베이징대학에 벽보가 나붙었다. “선충은 옌안에서 파견한 공산당 특무요원이다. 미국과 중국을 이간질하기 위해, 온갖 기술 동원해 미군을 유혹했다. 대학생을 선동하려는 공산당의 계략에 이용 당하지 말자.”



언론기관에 잠입해있던 중공 지하당원이 교무처로 달려갔다. 학적부를 뒤졌다. 선충의 이름과 연락처가 있었다. “베이징대학 학생이 분명하다”며 고향과 베이핑의 주소까지 보도했다.



베이징대학 여학생회도 진상 파악에 나섰다. 학생 대표 여덟 명이 선충의 거처를 방문했다. 며칠 후 방문기를 각계에 배포했다. “선충은 명문 집안 딸이다. 할아버지 선바오전(沈?楨·심보정)은 양강총독과 타이완(臺灣) 순무(巡撫)를 역임했고 아버지는 교통부 차장을 지냈다. 베이징대학 학생처장도 한 집안이다. 외가도 출중하다. 엄마가 청나라 말기 서구사상 전파에 힘쓴 린친난(林琴南·임금남)의 딸이다.”



여성계는 성명 대신 “수난자에게 드린다(給受難者)”는 시를 발표했다. “너는 2억 중국여인들의 수난을 대신했다. 아니다. 4억 중국인의 수난을 혼자 감당했다.”



여학생들은 통곡하며 거리로 나왔다. 남학생들은 더 길길이 뛰어댔다.



베이징대학 교수들은 전전긍긍, 한숨만 내쉬었다. 점잖다는 소리 듣던 철학과 교수가 총장 후스(胡適·호적)의 등을 떠밀었다. “팔짱만 끼고 있지 마라. 직접 나서서 수습해라.” 후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빠지는 습관이 있었다. 성명서 대신 교육부장 주자화(朱家?·주가화)와 교수들에게 선충 사건을 상세히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끝으로 덧붙였다. “피해자가 변호사를 선임했다. 우리도 변호사를 구하자. 현재 미군은 외출 금지령이 내렸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대학에는 법률 전문가들이 많다. 관심 가져주기를 호소한다.”



기자들이 후스를 방문했다. 후스의 대답은 기자들을 실망시켰다. “신문을 보고 알았다. 현재 아는 게 별로 없다. 진상을 파악 중이다. 조속한 시일 내에 합법적인 해결을 희망한다. 사실이라면, 국민들의 분개는 당연하다. 중국인 특유의 도덕적인 문제이다 보니 학생들의 시위도 이해는 간다. 수업 거부는 안 된다. 학생이 있을 곳은 교실이지 거리가 아니다.”



미군 철수 요구에 대한 소감도 피력했다. “그건 정치 문제다. 이 사건과는 별개다. 이미 낡아빠진 구호라 별 의미가 없다. 미군이 주둔하는 한, 언제고 나올 수 있는 구호다.”



문제는 시기였다. 국공 담판이 파열되고 내전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미군 주둔여부는 민감한 문제였다. 상황을 주시하던 중공 중앙은 유엔 창설 문제로 미국에 체류 중이던 둥비우(董必武·동필무)와 청년들에게 신망 높던 우위장(吳玉章·오옥장)에게 급전을 보냈다. 강간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베이핑에서 미군이 중국 여학생을 강간했다. 애국운동 조성에 노력하기 바란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해외 화교들에게도 널리 알려서 시위를 벌이도록 해라.”



시위가 계속되자 미국은 중국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중국 원조를 중지했다.



60여년 후, 선충이 사망하자 사건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폭력 흔적이 없는 강간사건”이라는 요상한 결론이 났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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