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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울어야 하나” 미 의원 120명 의사당서 연좌농성

중앙일보 2016.06.24 02:16 종합 1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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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하원 회의장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총기 규제 법안 통과를 요구하며 사상 초유의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의 휴회 선언으로 C-SPAN방송이 중계를 중단하자 의원들은 SNS를 통해 현장 소식을 전했다. 이 사진은 첼리 핑리 의원이 AP통신에 제공했다. [워싱턴 AP=뉴시스]


22일 오전 11시25분(현지시간).

미국 의회 이례적 점거농성
총기규제 관련법 4건 거부에 항의
흑인 인권운동 이끈 루이스 주도


미국 워싱턴D.C의 하원 본회의장 발언대에 선 존 루이스 하원의원(77·민주·애리조나)이 비장한 얼굴로 연설을 시작했다. 루이스 주변을 민주당 동료의원 40여 명이 둘러쌌다. “우리는 총기폭력으로 수십만 명의 생명을 잃었다. 얼마나 더 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비탄의 눈물을 흘려야 (총기규제) 결정을 하겠는가. 우리는 눈과 귀가 멀었는가. 우리는 너무 오랜 기간 침묵했다. 하지만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발언이 끝나자마자 40여 명의 의원들은 갑자기 의장석과 발언대 근처 바닥에 철퍼덕 앉아 무기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의사당 점거 농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의회사에서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날 농성은 미 역사상 최대의 총기참사인 올랜도 총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틀 전 상원에서 총기규제 관련법 4건이 모조리 거부된 데 이어 하원에서도 다수당인 공화당에 의해 표결 자체가 봉쇄된 데 따른 것.

이들은 민주당이 주장하는 ‘No Fly, No Buy (출국금지 대상자의 총기구매 금지)’법안의 표결을 의회가 장기 휴회에 들어가는 전에 처리할 것을 폴 라이언 의장에게 요구했다. 이날 농성의 구호도 “입법 없이 휴회 없다(No bill, No break)”였다.

이날 ‘연좌농성’ 작전은 21일 밤 루이스 의원실에 모인 15명에 의해 전격 결정됐다. 일부는 22일 오전에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의회를 방문할 일정이 있다는 이유로 “클린턴 후보와 연계돼 있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며 연기를 주장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22일 강행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연좌농성은 루이스 의원이 주도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는 1960년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흑인 시민인권운동을 이끈 지도자 ‘빅6’ 중 유일한 생존자다.

연좌농성이 시작된 후 혼란이 계속되자 라이언 의장은 오후 1시 휴회를 선언했다. 의회 규칙에 따라 의회전문 케이블채널인 C-SPAN이 방송을 끊었고, CNN 등 언론사 카메라도 철수시켰다. 농성 의원들은 SNS를 통해 농성 현장을 찍어 날랐다. 이때부터 농성의 열기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현상”(뉴욕타임스)이 미 정치의 변화를 주도하는 순간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농성 참여의원은 최대 170명까지 늘어났다. 대선 경선후보 버니 샌더스를 비롯, 클린턴 전 장관의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엘리자베스 워런, 팀 케인 상원의원도 잇따라 응원 방문에 나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트위터를 통해 “우리가 가장 필요할 때 총기폭력에 대한 반대를 루이스 의원이 이끌어줘 감사하다”고 밝혔다. 시간이 지나며 밤샘 농성을 위해 담요와 베개, 탄산음료까지 반입됐다.

그러자 공화당도 강경 대응에 나섰다. 라이언 의장은 이날 오후 CNN에 출연, “이번 연좌농성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쇼(publicity stunt)”라고 비판했다. 오후 6시부터는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총기규제 법안이 아닌 다른 법안의 정상 처리를 위해 밤 10시 회의 속개를 결정했다.

혼란은 이때부터 극에 달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총기 사건 희생자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든 채 의장석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일부는 최근 수년간 총기사고로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사진을 치켜들고 라이언 의장을 향해 ‘창피한 줄 알아라(Shame, Shame, Shame)’를 반복해서 외쳤다.

투표 도중 민주당 의원들은 시위 때 자주 부르는 찬송가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의 가사를 ‘We shall pass a bill (법안을 통과시킬 것)’로 바꿔 합창하기도 했다. 아수라장 속에 공화당 의원들도 멍하니 이를 지켜봤다.

23일 새벽 3시쯤 공화당이 다시 ‘지카 바이러스’ 관련예산 표결을 끝내고 다음달 4일까지 휴회를 선언한 뒤에도 민주당 의원들은 이틀 째 농성을 이어갔다. 루이스 의원은 “ 7월에도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회 밖에도 총기규제에 찬성하는 시민 200여 명이 몰려왔다. 일부는 ‘우리는 올랜도다(We are Orlando)’라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소수당과의 협력을 우선시하는 상원과 달리 하원은 다수당이 절대적 권력을 갖는 구조”라며 “때문에 공화당 지도부가 이 관행을 뒤집고 표결 요구에 응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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