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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신공항, 빈 배 띄워 민란 잡다

중앙일보 2016.06.24 01:03 종합 3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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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남권 신공항’은 연착륙했다. 가덕도도 아니고 밀양도 아니다. 기존 김해를 활용하자는 결정은 콜럼버스 달걀 같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게 국민 상식이었다. 확장된 김해공항이 신공항이냐 아니냐는 논란은 부차적인 것이다. 온 나라가 부산파와 대구파로 갈려 쪼개지고 세상의 관심이 한쪽에 쏠린 채 한여름을 지낼 악몽에서 벗어난 게 중요하다. 연 4000만 명의 항공수요를 충족하면서 국민 혈세 6조원을 절약할 수 있다니 그러면 된 것이다.

발표 당일 정의당의 심상정 대표가 “박근혜 정부 아래서 이뤄진 가장 책임 있는 결정”이라는 평가가 정곡을 찔렀다. 어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김해공항 확장안’+‘영남권 신공항 추진 말았어야’ 합계 지지율이 70%대, ‘밀양 선택해야’와 ‘가덕도 선택’이 각각 한 자릿수로 나온 게 이런 사정을 한 번에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돈 낼 사람들은 가만히 있고 돈 쓸 사람들만 떠들썩하게 난장을 피운 게 신공항의 진짜 문제였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현직 대통령들이 표 좀 얻어 보겠다고 영남권 신공항 얘기를 불쑥 꺼낼 때 ‘그 돈은 누가 낼 거냐’고 악착스레 따지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이다.

지금까진 그랬다 쳐도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겠다. 내가 피처럼 벌어 낸 세금을 누구 맘대로 쓰느냐, 걸핏하면 지역 국회의원들이 예산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하는데 이젠 그런 얘기들도 허허 웃어넘겨선 안 되겠다는 각오가 생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마음에 부합하는 결정을 해놓고 엉뚱한 쟁점을 만들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청와대가 앞장 서서 공약 파기가 아니라고 우기다니. 박 대통령은 대선 20일쯤 전인 2012년 11월 30일 부산 유세에서 “가덕도가 최적의 입지라면 당연히 가덕도로 할 것이다. 부산 시민들께서 바라는 신공항을 반드시 건설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공약했다. ‘부산 시민들이 바라는 신공항’이 가덕도인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동영상을 다시 틀어서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런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청와대 대변인이 “김해공항 확장도 신공항이다. 공약 파기가 아니다”고 불을 질렀으니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공약 파기라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앞으로 김해공항 확장을 신공항 수준으로 잘 지어 보이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수하게 사과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기회였다. 그런 대통령을 향해 “트레이드 마크인 약속과 신뢰는 어디 갔느냐”고 야박하게 몰아붙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직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뜨거운 충돌이 벌어지는 사안일수록 열을 식히고 쿨하게 접근해야 한다. 지금 대구와 부산의 허탈·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모양새다. 내면에선 상당수 지역민들이 ‘최악은 피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가덕도로 선택됐다면 대구가, 밀양으로 결정됐다면 부산에서 진짜 민란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여우와 신포도 우화도 있지만 내가 못 먹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미운 놈이 먹는 건 못 참는 법이다.

신공항에 관한 한 대구와 부산은 어느 새 적이 되어 버렸다. 적대성으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집단 감정은 기술적이고 중립적인 제3의 구멍으로 김을 뺄 필요가 있다. 죽은 줄 알았던 김해의 재등장에 ‘이건 뭐야’ 하면서도 ‘너라면 괜찮아’ 하는 심리적 출구로 삼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2500년 전 고전인 『장자(莊子)』엔 ‘빈 배 이야기’가 나온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좁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배 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당장 비키라고 소리치고 화를 낼 것이다. 아까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은 화를 내는 것은 왜인가. 아까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어서다!” 빈 배와 부딪치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신공항 스토리는 요약하면 사람 가득한 대구와 부산에 김해라는 빈 배를 충돌시켜 민란의 심리를 달랜 것이다.

전영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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