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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결정장애 있는 분은 오지 마세요"···우리술 명주 122가지 있는 여기는?

중앙일보 2016.06.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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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따라기'는 김동인의 단편소설 '배따라기'(1921년)에 의지해 지어낸 말이다. 평안도에 전해오는 민요 제목이기도 하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배따라기에 대해 '배 떠나기(船離)의 방언이며 곡조는 그지없이 처량하다'라고 했다. ‘맛따라기’는 말 그대로만 보면 '맛 떠나기'가 되는 셈이다. 독자에게 바라기는 표준어와 방언이 곰삭은 맛으로 어우러진 ‘맛·따라·떠나기’라는 뜻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아랫목에는 맛의 추억이 있었다. 밥 주발 묻어 두고 가족을 기다리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편안하고 깊은 맛. 이제 우리에겐 아랫목도 없고, 우리 어머니만 빚어낼 수 있는 맛도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입맛 유전자는 남아있다. 음식마다 맛깔이 다르듯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다. 사람들은 그 맛깔과 입맛에 대해 즐겨 이야기한다.

대화에 참견하는 마음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수다의 한 당사자이므로 의견은 매우 주관적이다. 나의 입맛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자칭 미식탐험가의 맛집 방랑기쯤 될 것이다. 때때로 맛을 따라 떠나는 독자들의 나들이에 길잡이가 될 수 있으면 행복하겠다.

술집 얘기로 말문을 연다. 강남 한복판에, 시쳇말로 역대급 우리 술 전문 주점이 생겼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 카페골목에 자리잡은 '백곰막걸리&양조장'(서울 강남구 압구정로48길 39 / 전화 02-540-7644)이다. 대한민국 유행 첨단지대에 복고풍 전통술 전문점이 치고 들어간 것이다. 술 다양하고 매장은 크다. 개업(6월 13일) 열흘인데 벌써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이런 술집의 등장은 우리술 시장 진화에 중요한 전기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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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곰막걸리&양조장`은 건물이 동화에 나오는 숲속의 집 같은 분위기다.


# 나의 막걸리 풍경
1960년대 고향 집에는 늘 술이 있었다. 할머니는 술이 떨어지면 끼니에 밥하듯 술을 담갔다. 당신의 외아들이 애주가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밀주다. 밀주단속반과 숨바꼭질도 피할 수 없었다. 술을 담그면 잔심부름은 내 몫이었다. 익으면 맛보기에도 동참했다. 우리 집에서 막걸리는 미성년자 금지 식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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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모내기가 한창인 농가를 찾아 막거리를 마시고 있다. 1977년 쌀먹걸리가 해금되기 전엔 밀가루 막걸리를 마셨다.


1977년 박정희 정부는 쌀막걸리를 해금했다. 1963년 3월 1일 쌀로 막걸리 만드는 것을 금지한 지 14년 만이다. 그 해 12월 8일 쌀막걸리가 시중에 나왔다. 11월 10일 대입 예비고사를 치른 우리는 본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을 때였건만 몇몇이 친구네 골방에 모여 ‘민족의 경사’라며 축배를 나눴다. 그때 막걸리 한 되(2L) 값은 210원이었다. 사립대 등록금의 0.1% 언저리다. 

2009년 무렵 막걸리 붐이 일었다. 너도 나도 막걸리를 찾고 화제로 삼았다. 일본에 수출도 꽤 했다. 그러나 2011년을 정점으로 다시 잠잠해졌다.

그 시절, 오랜만에 마신 막걸리에 나는 실망했다. 술들이 너무 달았다. 기대한 맛이 아니었다. 차츰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가 전국에서 유명하다는 막걸리 8가지를 골라 마실 수 있는 주점을 발견했고 입에 맞는 막걸리도 찾았다. 예전 할머니가 담근 술 맛과 비슷했다. 그걸 실마리로 막걸리 고수들이 빚는 다양한 술이 전국에 있다는 것을 알아갔다. 우리술 시장은 정체기를 거치면서 질적으로 변화했다. 전국의 숨은 고수들이 갈고 닦은 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품질은 높아지고 저변은 넓어졌다.

그 결과 지난해와 올해 우리술 시장은 2차 전성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프리미엄 막걸리 주점들이 새로 문을 열거나 매장을 늘렸다. 서양 술 주점보다 고급스럽고 현대적인 인테리어에 신개념 안주까지 갖추고 젊은 층과 외국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올 들어 막걸리 제품이 다양해지면서 판매·수출이 많이 늘었다는 뉴스도 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백곰막걸리&양조장’(이하 ‘백곰’)의 개업은 기록적인 일이다. 

# 두 '술꾼'의 의기투합
'백곰'은 현재, 리스트 기준으로 122가지 우리술을 판매한다. 막걸리 34종, 약주(맑은술) 36종, 소주·증류주 42종. 전국 명주를 망라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 200종까지 늘릴 계획이다. 결정장애 있는 사람은 마실 술 고르는 것부터 고난이겠다. 매장 넓이는 지하(수제맥주점)·지상 합쳐 3개 층 95평이다. 지하에는 8평 규모의 양조장도 만들어 허가를 받으려고 준비 중이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술 선택의 폭이 가장 넓은 주점일 터이다. 막걸리는 1병 8000원짜리도 많지만 500mL에 5만원짜리도 있다. 국내 최고 도수의 막걸리 ‘이상헌 탁주 19%’다. 70도짜리 우리술이 있다는 말을 들어는 보셨는지. 서울 '삼해소주'인데 400mL에 49만원을 받는다. 6000원 받는 ‘한라산’ 소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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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가격에서 최고 기록 타이틀 2관왕인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8호 ‘삼해소주’다. 삼해소주의 레이블엔 병마다 다른 도수가 표시돼 있다. 올 4월 2일 생산한 병은 71.6도다

 이렇게 많은 술을 구비할 수 있던 건 두 공동대표의 오랜 탐구와 발품 덕이다. 개업 날 혼인신고를 한 이승훈(40)·유이진(31) 부부는 업계에서 이미 유명한 '술꾼'이다. 마시는 실력도 담그는 솜씨도 수준 높은 전문가다.

대기업에 다니다 우리술에 꽂혀 인생 항로를 바꾼 이씨는 한국막걸리협회 사무국장, 막걸리학교 강사, 우리술품평회 심사위원, 우리술 주안상대회 조직·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자동차 부품회사에 근무하다 우리술에 인생을 걸고 전통주 주점으로 직장을 옮겼던 유씨는 막걸리학교 교육팀장, 가양주 주인(酒人)선발대회(2회), 전통주 소믈리에 일반부문, 우리술 주안상 대회에 각각 입상한 경력이 있다. 이쯤이면 꾼도 보통 꾼이 아니다.

두 사람은 개업을 준비하면서 전국의 양조장을 300곳쯤 순례해 인맥을 닦았다. 그 중 100곳 이상이 현재 주류 거래가 가능하다고 한다. 전국의 수많은 맛집과 이름 있는 주점을 순회하며 벤치마킹을 한 건 물론이다. 그 덕에 술꾼 동네에서는 마당발을 넘어 ‘광장발’을 자랑한다. 나와의 인연도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얼굴을 익히며 시작됐다. 둘이 술 사업에 의기투합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 공동대표로 운영을 하니 ‘백곰’은 가히 준비된 술집으로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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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투합해 압구정 로데오 거리 첨단 유행지대 한 복판에 우리술 깃발을 꽂은 두 ‘술꾼’ 이승훈·유이진(왼쪽) 공동대표. 두 사람은 부부다.

# 우리 술의 '국제시장'을 꿈꾸며
'백곰'이 자리잡은 도산공원 이웃에는 골목마다 맛집이 자리잡고 있다. 루이쌍끄, 권숙수, 몽고네, 톡톡, 밀크포차 등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그런 만큼 안주에도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층에게는 새롭고, 외국인에게는 거부감 없는 한식 안주를 지표로 했다. 로데오 거리를 오가는 외국인의 입맛을 우선 고려했다. 이·유 두 사람이 꿈꾸는 ‘백곰’의 미래는 세계인이 어울려 우리술을 마시고, 세계에 알려 수출도 하는 ‘술의 국제시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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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곰의 대표 안주. 왼쪽부터 두부볼과 사골육수에 졸인 묵은지, 민물새우튀김과 채소 샐러드, 직화제육구이와 제철 쌈채 안주.

호주의 한식당에서 2년간 일하던 요리사를 초빙했다. 돼지등갈비튀김, 구운 보쌈, 직화제육구이와 제철 쌈채, 미니떡갈비와 샐러드, 새우야채전, 민물새우튀김, 부채새우탕, 맛탕 품은 김치전, 두부김치 크로켓, 두부볼과 사골육수에 조린 묵은지, 부추장떡 등의 메뉴가 그의 손에서 특별한 사명을 띠고 만들어졌다. 한식의 다양한 변주다. 안주들은 아이디어 좋고 맛도 있지만 아직 간이나 양의 조율이 필요해 보인다. 쌈채는 모두 강원도 양구에서 유씨 부모님이 재배해 보내오는 유기농 채소다.

# 주인이 추천한 술 마셔보니
이승훈 대표는 제주에서 온 '맑은 바당'을 권했다. 논 귀한 제주에서 계약재배한 논벼 쌀과 누룩·물만으로 옹기에서 100일을 익힌 생 약주다. 2년밖에 안 된 신생 도가(제주바당) 술로 알코올 15%의 맑은술인데 500mL 1병에 3만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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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부부가 추천한 소주 `맑은 바당`.


유서 깊은 명주들에 비해 밀리지 않을 맛이다. 맛의 구조가 아주 짱짱하다. 옅은 연둣빛이 감도는 술 한 모금을 입에 무니 향이 안개처럼 입안에 퍼진다. 혀로는 바람처럼 은은한 단맛이 감돈다. 누룩 냄새를 싫어하는 신세대를 위해 누룩을 적게 쓰고 효모가 자체 증식해 발효가 되도록 100일에 걸쳐 세 번을 빚어(삼양주) 나온 맛이라 한다. 도가 역사가 단 2년뿐인데 이런 맛을 빚는구나, 고개가 끄덕여진다. 

토요일 초저녁 매장에는 전통술 주점인데도 여성 손님이 의외로 많다. 여성끼리 모인 테이블도 보인다. 동네 트렌드를 반영하는 현상일까. 고급 카페 같은 깔끔한 인테리어와 넉넉한 공간, 크고 작은 반(半)개방 별실들이 여성들 기호에 맞나 보다. 벽이 많으니 술기운에 왁자지껄하면 실내 전체에 소리가 울려 시끄러운 건 참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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