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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순’은 있고 ‘오해영’에겐 없는 것

중앙일보 2016.06.22 01:08 종합 2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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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연애를 시작한 남녀가 있다. 어느 날 남자가 지방으로 1박2일 출장을 가게 됐다. 여자에게 이를 알렸더니 “그럼 오늘 못 봐? 보고 싶어서 죽어 버릴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돌아와서 연락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남자의 부하직원들이 경찰을 사칭하며 여자를 회사에서 빼돌린다. 둘이 알콩달콩 데이트를 하는 사이 여자의 어머니는 그녀가 납치된 줄 알고 기절을 하고, 진짜 경찰이 지방까지 그들을 찾아간다. 요즘 현실적인 연애 드라마라는 칭송을 듣는 ‘또! 오해영’(tvN·이하 오해영·사진) 14회 내용이다.

자기 성장 위한 노력 찾기 힘들어
사랑이 유일한 구원인 여성 캐릭터
변주된 신데렐라 판타지로 퇴행


‘오해영’하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내 이름은 김삼순’(2005, MBC·이하 김삼순)이다. 당대 여성들의 현실과 욕망을 실감나게 반영한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다. 결혼이 아니라 연애의 완성을 꿈꾸고, 남자의 여자이기 전에 한 명의 사회인이며, 예쁘지 않으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통념에 도전하는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는 2030 싱글 여성의 현실 극복 로맨스라는 장르로 이어졌다. ‘오해영’은 ‘김삼순’의 직계라기보다 여성 캐릭터의 퇴행을 보여준다.

물론 오해영(서현진)을 둘러싼 현실은 오늘의 세태를 반영한 측면이 있다. 극중 오해영은 ‘예쁜 오해영’과 대비돼 ‘그냥 오해영’으로 불린다. 우리 사회에서 여자란 다른 무엇보다 외모로 평가되기 일쑤다.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나 영화 ‘미녀는 괴로워’처럼 과장된 설정으로 외모 콤플렉스를 풍자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처럼 평범한 여자들이 일상에서 무례하게 대해지는 상황을 집요하게 묘사해낸 작품은 없었다. 여자의 외모를 품평하고 비교하고 조롱하는 한국사회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그냥 오해영’이 느끼는 모멸감에 수월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붙여준 ‘그냥 오해영’의 또 다른 별명은 ‘흙해영’이다. 스펙 좋은 동창 ‘금해영’이 상사로 스카우트돼 올 때 ‘흙해영’은 승진에 미끄러지거나 기획이 후지다고 면박을 당한다. 가진 건 별로 없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봤자 생색은 안 나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 인생, 그것이 바로 흙수저의 비애다. 하지만 공감은 여기까지다.

김삼순에는 있고, 오해영에는 없는 것은 뭘까. 오해영은 털털하다 못해 ‘주폭’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연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다 못해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예쁜 오해영’에 대한 콤플렉스와 결혼식 전날 차인 트라우마가 겹쳐 심각한 애정결핍 증세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부족해 보인다. 바로 캐릭터의 성장 가능성이다. 오해영에게서는 처한 현실을 이성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일련의 연애 사건을 계기로 이성은 소멸되고 감정만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여성 캐릭터의 유아적 일탈 행각은 분명 이 드라마의 큰 흥행 요소다. 하지만 동시에 오해영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읽어내려는 시도가 불편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대체 왜 자신과 예쁜 오해영을 사사건건 비교하려 드는 남자들 대신 해영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일까. 자존감을 상처받은 오해영의 인생에 한줄기 빛처럼 나타난 것이 남자다. ‘예쁜 오해영’이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그냥 오해영’의 오랜 콤플렉스를 한 방에 날려버릴 결정타다.

어쨌든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방법은 박도경(에릭)의 사랑을 얻어내는 길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해영은 필사의 구애를 한다. 보고 싶다고 울고 불고 고백한다. 서현진의 섬세한 연기와 서정적인 미장센이 맞물려 대단히 애잔한 건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2030 싱글녀의 현실 극복 로맨스라기보다 변주된 신데렐라 판타지에 가깝다.

‘몸이 마음에게 물었다. 난 아프면 의사가 고쳐주지만 넌 아프면 어떻게 하니? 마음이 말했다. 나는 나 스스로 치료해야 돼.’ 11년 전 김삼순은 그랬다. 그런데 오해영은 온세상이 떠나가라 제 상처를 떠벌리며 왕자님의 구원을 기다린다. 그녀는 재미있지만 닮고 싶진 않은 친구다.

이숙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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