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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흔든 시 한 줄] 정유정 소설가

중앙일보 2016.06.22 00:45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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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소설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문병란(1935~2015), ‘호수’ 중에서

모든 걸 주고 떠나신 엄마
삶의 궁극적 사랑을 만나다


제 인생에서 시 하면 가장 먼저 꼽는 작품입니다. 제가 스물다섯 때, 마흔아홉이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이 시를 떠올립니다. 3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이 딸에게 모든 걸 주고 가셨습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궁극적인 사랑 하나쯤 품고 있을 겁니다. 이 시는 부모든, 연인이든, 그 순수했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문병란 시인은 1970~80년대 불의의 시대에 맞섰습니다. 그때 문학 좀 한다는 여고생 치고 그의 시를 읽지 않은 아이는 거의 없었을 겁니다. 문 시인은 또 감성의 시인이었습니다. ‘꽃처럼 붉은 감성’과 ‘새파란 저항의지’를 지녔습니다. ‘호수’는 개인의 실존적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제 등단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에도 인용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 소년이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대목에서 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에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유정
소설가


‘호수’
-문병란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 밤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무수한 어깨들 사이에서
무수한 눈길의 번득임 사이에서
더욱더 가슴 저미는 고독을 안고
시간의 변두리로 밀려나면
비로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 사이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을 사랑해버린 다음
비로소 사랑해야 할 사람
이 긴 기다림은 무엇인가

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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