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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연평도 중국 어선 해법

중앙일보 2016.06.22 00:43 종합 2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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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파시(波市)’란 문자 그대로 ‘물결치는 시장’이다. 풍어기를 맞아 고기를 잡으려 몰려든 어선과 사려고 몰려든 상선들이 어우러진 ‘바다 시장’을 말한다. 출렁이는 건 바다만이 아니다. 만선(滿船)에 주머니가 두둑해진 선원들이 한잔 술로 피로를 달랠 술집과 음식점, 싱싱한 생선을 구해 한몫 챙기려는 상인들이 배를 기다리며 쪽잠을 청할 여관, 지루한 시간을 메워줄 온갖 위락시설과 점포들이 어장에서 가까운 육지에 생겨난다. 그때가 되면 “사흘 벌어 1년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풍요로웠다. 단단한 땅도 바다만큼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을 터다.

연평도 파시와 흑산도 파시, 위도 파시가 특히 유명했다. 그중에서 연평도 파시의 역사는 오래다.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편에 처음 등장하는데 “석수어(石首魚·조기)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나라 곳간도 더불어 채워 주던 파시는 어장의 흥성과 함께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 오다 오늘날에는 현대적인 어업과 수산시장의 등장에 따라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런 낭만적인 이름 파시가 요즘 심심찮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기름진 낭만은 쪽 빠지고 뼈다귀 같은 생존만 남았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나들며 저인망을 훑어 어족의 씨를 말리고 있는 중국 어선들 탓이다. 남북 경계 해상에 파시를 열어 북한 어부들이 잡은 생선을 우리가 사 주자는 얘기다. 그러면 남북한이 공동대처해 중국 어선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고육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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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게 가능할까. 듣기에 썩 괜찮은 아이디어 같지만 현실성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백령도·연평도 일대 중국 어선들의 존재는 파시만큼이나 그 역사가 길다. “17년 전부터”라고 혀 차는 소리가 나오지만 중국 어선들의 기획적 불법어로는 그보다 훨씬 오래다.

영조 때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이미 그 얘기가 나온다. “장산곶 아래 바다에서는 복어와 흑충(해삼)이 잡힌다. 복어는 『한서』에 왕망이 먹었다고 기록된 것인데 (산둥성의) 등주(登州)나 내주(萊州)에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것보다 맛이 없다. 이익이 많다 보니 중국 배들이 갈수록 더 많이 와 바닷가 백성들에게 해를 많이 끼친다. 관가에서 장교와 아전을 보내 쫓으면 바다로 나가 닻을 내리고 있다가 사람이 없어지기를 기다려 다시 올라와 해삼을 잡아 간다.”

중국 배들의 조업이 일상이다 보니 조선 후기 서양 선교사들의 주요 밀입국 루트가 된 곳도 그곳이었다. 중국 어선의 규모는 날로 커져 조선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 어선들이 백 척 또는 천 척 단위로 무리를 지어 와 정월부터 바다 한가운데 머문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때도 중국 선원들은 조선 관원의 단속에 맞서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이 중국 정부에 통제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백년하청(百年河淸)이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들이 250년 전, 아니 그 훨씬 전부터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옛일을 길게 늘어놓는 건 한탄이나 하자는 게 아니다. 좀 더 차가워져야 한다는 얘기다. 남북이 하나였을 때부터 골치였던 중국 어선들이 남북 대치라는 구조적 허점을 영악하게 파고들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문제가 심각하다 보니 파시뿐 아니라 서해 NLL 인근 해역을 ‘남북공동어로수역’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 새로운 것도 아니고 ‘남북 대치’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모두 허망한 공염불이다.

우선 지금 국면에서 북한이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다. 우리가 한강 하구에서 불법 조업하던 중국 어선을 나포한 데 대한 북한의 일성 역시 “도발하지 말라”는 비난이었다. 우리는 이미 북한이 서해 수역의 조업권을 중국에 팔았음을 안다.

북한 해군 제8전대는 중국 어선의 입어료(入漁料)와 군 소속 어선의 조업으로 연간 1억 달러 상당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북한의 조업권 판매는 외화벌이 외에 남한이 선포한 NLL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

게다가 어선과 군함의 경계가 모호한 북한과 공동조업을 하는 데 대한 군 당국의 우려도 정당할 수 있다. 자칫 북한 해군력(북한은 해경이 없다)이 인천 앞바다에까지 미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나. 또한 개성공단까지 문 닫고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한 국제제재 공조를 독려하는 마당에 우리가 파시를 열어 북한 생선을 사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어쩌나. 결론 역시 공허하다. 하지만 중요하고 절실한 공허다. 남북 간 신뢰 회복과 관계 개선이 먼저라는 말이다. 남북이 서로 믿게 되면 파시건 공동어로건 못할 게 없다. 그러기 위해 당장 제재를 풀 순 없어도 빗장을 잠그진 말아야 한다.

끊임없이 북한을 테이블로 불러내고 필요에 따라 중국도 미국도 설득해야 한다. 공존 말고는 해결책이 없다. 중국 어선 문제뿐 아니라 훨씬 더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저성장·저출산 문제의 탈출구를 위해서라도 북한은 우리의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 통일은 그 덤이다.

이 훈 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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