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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3.5’…야당이 다시 꺼낸 화폐단위 개혁

중앙일보 2016.06.22 00:01 경제 1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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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60,000,000,000,000원(1경2360조원)’

금통위 출신 더민주 최운열 의원 정책 제안
한국은행은 10년 전부터…리디노미네이션 대비해야?
네 자릿수 환율 OECD 중 유일…“물가 낮아 적기”
일부선 “시민 혼란 우려…구조조정에 집중할 때”


지난해 한국의 국민순자산(국부) 규모다. ‘0’만 13개다. 이런 ‘경(京)’ 단위 통계가 이젠 흔하게 됐다. 한국은행 금융전산망을 통한 원화이체 규모는 지난 한 해만 6경원을 훌쩍 넘었다. 증시 관련 대금도 2경원을 상회한다.

1962년 ‘제2차 화폐개혁’ 이후 50년이 넘도록 경제 규모는 비약적으로 커졌는데 화폐단위는 변하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다. 자연히 불필요한 비용과 불편을 초래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화폐단위 절하)’이 꼽힌다. 1000원을 10원이나 1원으로 바꾸는 식의 화폐단위 조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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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이 리디노미네이션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 더민주 경제민주화 태스크포스(TF) 팀장인 최운열(초선·비례대표·사진) 의원은 21일 라디오에 출연해 “화폐단위가 너무 커져 앞으로 사회적인 비용을 많이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화폐단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출신인 최 의원은 본지와의 통화에서도 “이미 시장에서 먼저 1000 대 1로 화폐단위를 변경해 앞서 나가고 있다”며 “한 번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다시 바꾸기 힘드니 이왕이면 1000 대 1로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시중에선 자발적인 리디노미네이션이 확산되고 있다. 커피숍 등에서 3500원을 ‘3.5’로, 1500원은 ‘1.5’로 표시한 가격표가 낯설지 않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단위 조정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당시 류성걸 새누리당 의원이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화폐의 단위가 높다는 논의가 있다”고 하자 “최근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제기된 것으로 알며,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파장이 커지자 한은은 “리디노미네이션의 장단점이 뚜렷하므로 국민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얘기”라며 “리디노미네이션의 추진 의사를 밝힌 게 아니다”고 해명했다. 앞서 참여정부 시절에도 당시 박승 한은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창하고 나서 쟁점화됐다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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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리디노미네이션 필요성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화폐단위가 커짐에 따른 거래 불편은 물론 세계 10위권인 한국 경제 수준에 ‘네 자릿수’ 환율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다. 최 의원은 “1달러가 1000원이 넘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한국이 유일해 국격에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화폐단위 절하 시 장부 기재가 훨씬 편리해지는 효과도 있다. 신·구권 화폐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저물가가 고착화되고 있는 지금이 적기라는 주장이 나온다. 리디노미네이션의 부작용 중 하나가 인플레이션 유발이다. 예컨대 950원짜리 물건이 1000 대 1의 화폐단위 변경으로 0.95원이 되면 실제로는 1원에 팔릴 가능성이 크고 이것이 물가 상승으로 귀결될 수 있다.

하지만 지난달 소비자물가상승률이 0.8%에 머무는 등 저물가가 이어지며 현재는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처지다. 물가가 뛰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애쓰던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다. 화폐단위 변경 과정에서 비용 유발 등의 우려도 있지만 반대로 자동화기기(ATM)나 전산시스템 교체 수요가 가라앉은 내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박승 전 한은 총재는 “물가를 오히려 끌어올려야 하고 경기부양도 필요하다는 점에서 부작용 우려가 적은 지금이 리디노미네이션의 적기”라며 “일시적으로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지만 개혁에는 불편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실익이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리디노미네이션은 돈이 휴지 조각이 되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황일 때나 시행하는 것”이라며 “일반 시민들이 느끼는 혼란도 생각보다 클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만큼 논의 시기가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백웅기 상명대 금융경제학부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의 효과는 일부 인정되지만 지금은 경기 활성화와 기업 구조조정 완수와 같은 일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정부와 한은은 현재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이다. 최 의원도 “아직 당내 논의가 무르익은 상태는 아니다”며 “앞으로 당론화를 적극 추진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한 국가에서 사용되는 모든 지폐나 동전의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조치다. 예컨대 1000원을 10원이나 1원 등으로 바꾸며 화폐단위를 조정하는 것이다. 경제 규모 확대와 물가 상승 등으로 거래에 사용되는 화폐 숫자의 자릿수가 크게 늘어나면 계산이나 지급 시 불편함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다.

하남현·이지상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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