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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9 -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은 어떻게 생겼을까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9 -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은 어떻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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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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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에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하늘의 빛이 물 위에 떨어졌다.

2000년 전 예수는 실제 이렇게 기도했다. 갈릴리의 들과 산, 예루살렘의 시장통, 올리브산의 방앗간에서 예수는 무릎을 꿇었을 터이다. 두 손을 모은 채 이렇게 읊조렸을 터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속성이 땅에 있는 저희의 속성이 되게끔 해 주소서. 그게 바로 예수의 기도였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일. 그게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예수는 실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법’까지 일러주었다. 하늘이 땅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누가복음 6장27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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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손을 만지며 기도하면 소망이 이루진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를 했을까. 마리아상의 손이 반질반질하다. 그들의 기도를 통해 하늘은 땅이 됐을까.

사람들은 갸우뚱한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게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리고 이렇게 추측한다. “아! 맞아.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싸울 일이 없겠지.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살겠지. 그러니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셨겠지.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래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을 테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물음표가 하나 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왜 싸우지 않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간단하다. 나에게 좋으면 ‘선(善)’이고, 나에게 싫으면 ‘악(惡)’이다. 내게 잘하는 사람은 ‘선인(善人)’이고, 내게 못하는 사람은 ‘악인(惡人)’이다. 우리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항상 ‘나’이다. ‘나의 이익’ ‘나의 철학’ ‘나의 잣대’다. 그걸 기준으로 이쪽은 선, 저쪽은 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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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창에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스. 빛이 십자가를 통과하고 있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도 날고 있다.

아담과 이브도 그랬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에덴동산에 선악은 없었다. 아담과 이브는 선도 몰랐고, 악도 몰랐다. 에덴동산은 그런 곳이었다. 선과 악으로 쪼개지지 않은 ‘온전한 곳’이었다. 그래서 낙원이었다. 선악을 나누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다. 그러니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부부싸움도 없었을 터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야 비로소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도 벌어졌을 테니까.

한마디로 ‘선 긋기’다. 내 마음의 선 긋기. 그로 인해 ‘이쪽과 저쪽’‘좋고 나쁨’ ‘선과 악’이 생겨난다. 그렇게 그은 선이 수십 개, 수백 개가 뭉쳐서 생겨난 결과물이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 그걸 ‘에고’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어 놓은 숱한 ‘선(線)’들이 뭉친 게 에고다. 그 선들이 에고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그 선(線)을 지우려면 말이다. 그 선을 지워서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야 우리가 ‘에덴 동산’을 만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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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올리브산의 작은 교회 안. 순례객이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다.

원수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은 ‘마음의 선’에 의해 원수가 생겨난다. 그 선의 이쪽은 아군, 저쪽은 적군이 된다. 나를 살리려 하면 아군이고, 나를 죽이려 하면 적군이다. 그 중에서는 그냥 원수가 아니라 ‘철천지 원수’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아군보다 적군을 더 자주 생각한다. 그렇게 떠올릴 때마다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선을 긋고, 그 위에 또 긋는다. 선은 갈수록 굵어지고, 갈수록 깊어진다. 그래서 원수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그럼 예수는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예수에게 주목했을 사람들. 저마다 가슴에 선을 긋고, 저마다 마음에 원수를 품었을 사람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누가복음 6장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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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채 걸어갔던 ‘비아 돌로로사(일명 십자가의 길)’에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서 있다. 그들은 누구의 원수이고, 또 누가 그들의 원수일까.

쉽지 않다. 누가 선뜻 그럴 수 있을까.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을 하라니 말이다.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키지도 않는다. 누구 좋아라고 그렇게 해야 할까. 저주에 저주를 거듭해도 시원찮은 데 축복을 하라니. 나를 학대하는 놈에게 기도를 하라니. 그게 대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예수는 한 술 더 떴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누가복음 6장2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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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성묘교회.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의 몸을 내려 이 돌 위에 뉘었다고 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자신의 옷까지 가져간 로마 병사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

듣고만 있어도 분통이 터진다. ‘뺨 맞은 것도 억울한데, 다른 쪽 뺨을 내밀라니’‘겉옷까지 빼앗겼는데, 속옷까지 내주라니.’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겠다. 설득력도 없다.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 성인의 ‘공자왈 맹자왈’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는 이 말끝에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누가복음 6장35절)

이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의 파도가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 물음이 올라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어로 ‘hupsistos(훕시스토스)’다. ‘가장 높은 존재’란 뜻이다. ‘huios(후이오스)’는 ‘아들(son)’이란 말이다. 그리스어로 ‘huioi hupsistou(sons of Most High)’는 ‘가장 높은 존재의 자식들’이다. 예수는 그렇게 표현했다.

왜 그랬을까. 왼쪽 뺨을 맞고서 반대쪽 뺨을 다시 내미는 일과 가장 높은 분의 자식이 되는 것.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이 구절을 단순히 ‘예수의 포상’으로만 읽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식이 되려는 ‘포상’을 바라면서 그렇게 행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그(원수)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누가복음 6장35절) 예수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에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었다. 원수에게 건넬 때도 그렇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때도 그렇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행해야 한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언가를 바랄 때 마음에 또 하나의 선을 긋게 되기 때문이다. 그 선들이 뭉쳐서 나의 에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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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채 사형장으로 걸어가다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능하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예수는 마음의 선을 긋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예수는 오른쪽 뺨을 내밀고, 속옷까지 건넬 때 왜 그분의 자식이 되는 지도 말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복음 6장35~36절)

예수의 설명은 명쾌하다. 그는 ‘하느님의 속성’을 한마디로 풀어낸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다.’ 왜 그럴까. 선을 긋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를 아는 자와 은혜를 모르는 자, 그 사이에 그은 선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가 다석 유영모는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 했다. 만약 그어놓은 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없이 계신’ 하느님이 될 수 없다. 없이 계시기에 ‘전지(全知)’이고, 없이 계시기에 ‘전능(全能)’이다. 그게 예수가 말한 ‘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비롭다. 그어놓은 선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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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쓰러지는 장면이다. 마음의 선을 지우기. 그게 예수가 말한 ‘자기 십자가’다.

예수는 거듭 강조한다. 하느님의 속성이 이러하니, 너희도 그 속성을 닮으라고 했다. 그럴 때 ‘후이오이 훕시스토우(huioi hupsistou·가장 높은 분의 자식들)’가 된다고 했다. 그게 우리가 받을 큰 상이다. ‘huioi(단수는 huios)’에는 '후예 ·후손'이란 뜻도 있다. 무엇에 대한 후예일까 .신의 속성'에 대한 후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했다. 그게 '신의 속성'에 대한 상속이다.

그러니 오른뺨을 맞고서 왼뺨을 내미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겉옷에 이어 속옷까지 내주는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걸 통해 내 마음에 그어놓은 ‘잣대의 선(線)’을 지우는 게 목적이다. 왼뺨을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내밀어도 ‘내 마음의 선’이 지워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죄없는 뺨만 아플 뿐이다. 원수를 수천 번 사랑한다 해도 ‘내 마음의 선’이 무너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원수는 여전히 원수일 뿐이다. ‘내 마음에 그은 선’이 하나ㆍ둘 지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닮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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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설교할 때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을 통해 비유를 했다. 갈릴리 오병이어 교회의 바닥에 그려진 물새 모자이크. 갈릴리 호수에서는 손쉽게 볼 수 있는 새다.

사람들은 묻는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알려달라. 우리가 어찌해야 ‘신의 속성’을 닮을 수 있나.” 예수도 그런 질문을 숱하게 받지 않았을까. 그래서 늘 생활에서 쉽게 보이는 것들에 비유해 설교를 했다. 예수는 이 모든 이치와 원리를 간추리고 간추려서 유대인들에게 ‘실전용 핵심 총정리판’도 내놓았다. 딱 한 마디로 설명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누가복음 6장31절)

거기에는 ‘선(線) 긋기’가 없다. 지구상의 모든 싸움은 ‘선 긋기’에서 비롯된다. 인류 최초의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선악과를 먹고 난 아담과 이브가 ‘내 마음에 선 긋기’를 시작하면서 부부싸움이 비롯됐을 것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부족 개념이 생기고, 국가 개념이 생기고, 민족 개념이 생기고, 인종 개념이 생길 때마다 ‘선’이 그어졌다. 그와 함께 싸움이 일어났다. 부부싸움이든, 국가간 전쟁이든 원리는 똑같다. 전쟁이 생겨나고, 전쟁이 사라지는 이치도 똑같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 마음에 선을 그을 건가, 아니면 지울 건가.”


<20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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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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