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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고 싶었지만, 여기 살려면 규칙상 낙태”

중앙일보 2016.06.21 02:10 종합 10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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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소록도병원으로 ‘출장 재판’에 나선 서울고법 판사 등이 ‘검시실’(본인 사전 동의 없이 한센인 사체를 해부한 곳)에서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 [뉴시스]


“저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었죠. 하지만 여기서 살려면 규칙상 낙태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20일 오전 9시40분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 소록도에 위치한 국립소록도병원 2층 소회의실. 법복을 입은 판사 세 명을 마주보고 앉은 70대 여성 A씨는 또박또박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여덟 살 때 한센병에 걸려 열일곱 때 들어왔다는 그는 “남편도 정관수술을 받았다”며 “재판부가 빨리 결정을 내려서 다시는 이런 법정에 안 오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한센인 한 서린 소록도 ‘현장 재판’
70대 여성 “남편도 정관수술 받아”


한센인들의 100년 한(恨)이 서린 섬, 소록도에서 이날 ‘특별한 재판’이 열렸다. 서울고법 민사30부가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소록도병원에서 1950~70년대 강제단종(정관절제)·낙태수술을 당했다”는 피해자 139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사건의 현장검증을 위해 소록도에 첫 임시 법정을 마련했다.

법정에 들어선 강영수(50·사법연수원 19기) 부장판사는 “오늘 재판은 원고 측의 의견을 현지에서 듣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며 재판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센인 이명철(75)씨는 “이런 서러움을 평생 병을 안고 산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이번 재판이 내게도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센인과 정부 측 대리인들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센인 측 변호인은 “한센병은 유전되는 것이 아님에도 국가는 법률상 근거나 개인의 동의도 없이 단종·낙태 수술을 진행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다”고 지적했다. 이에 국가 측 변호인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섬에 머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택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후에는 단종·낙태 수술이 행해진 공간 등에 대한 현장검증이 실시됐다. 소록도에서 50년 이상 생활한 이남철(67)씨가 현장 설명을 맡았다. 재판부는 한센인 시체 해부가 이뤄진 ‘검시실’과 한센인 부모와 자녀가 만나는 곳이었던 ‘수탄장(愁嘆場·탄식의 장소라는 뜻)’을 방문했다.

이씨는 “이 섬에 오기 전에 혹은 섬에서 몰래 낳은 자식들은 ‘미감아보육소’에 격리됐다가 한 달에 한 번 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2~3분, 그것도 전염을 걱정해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섰다”고 설명했다.

매년 합동추모제가 열리는 ‘만련당’에 갔을 때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 섬에서 사망한 사람은 2015년 10월 15일까지 총 1만942명이다.

정부는 2007년 국무총리 산하에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두고 조사를 벌여 6462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현재 540명이 5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날 진행된 소송의 당사자인 A씨 등 139명은 지난해 7월 1심에서 승소했다. 배상금은 1인당 3000만~4000만원으로 결정됐는데 정부의 항소로 2심이 진행되고 있다.

소록도=정혁준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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