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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북한 절친국 공략 성과 냈지만…60~70년대 냉전 외교 회귀

중앙일보 2016.06.20 01:40 종합 10면 지면보기
1975년 5월 6일 외무부 방교국(邦交局·유엔 업무를 담당하는 지금의 국제기구국)이 ‘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문제 대비 현 정세 판단 및 정책방안’이란 제목의 2급 비밀문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만날 때마다 같은 얘기만 하나”
현지선 지나친 북핵 집중에 불만
협조 대가로 청구서 날아올 수도

당시 유엔은 남북한 ‘외교전쟁’이 벌어지는 최전방이었다.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결의안(북한 측),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는 결의안(한국 측)이 매해 맞붙었고, 표 대결로 승패가 결정됐다. 특히 60~70년대 신생 독립국이 대거 유엔에 가입하면서 친공산권 회원국들이 늘어나 외교전쟁은 더 치열했다. 당시 특별사절단 파견, 원조 제공, 인삼 등 선물 전달, 고위급 인사 방한 초청이 외교수단이었다. 방교국의 문서도 이런 ‘특수대책’을 담았다.

이시영 전 유엔대사는 국립외교원이 발간한 증언록 『한국 외교와 외교관』에서 “결의안을 표결하는 날엔 담당국 대표들이 화장실을 가면 쫓아가 기다렸다가 다시 들어와 앉게 할 정도로 치열한 득표 교섭을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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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 국가 공략’에 외교력을 집중했던 60~70년대 냉전시대 한국 외교가 2016년에 재연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이후 강력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바꾸겠다는 정부의 대북 압박·고립정책에 따른 것이다.

선봉에 선 건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다. 지난 5일 한국 외교수장으로는 처음 ‘북한의 형제국’ 쿠바를 방문했다. 13일엔 러시아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과 만나 대북제재 이행 공조에 합의했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 문제 거론 자체를 꺼렸던 러시아가 이번엔 우리가 하자는 대로 따르며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전했다.

윤 장관은 15일엔 북한의 유럽 남동부 거점 국가인 불가리아를 찾았다. 다니엘 미토프 불가리아 외교장관은 윤 장관과의 회담에서 “북한의 해외 노동자에 대한 국제 공조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윤 장관은 20일엔 서울에서 해리 칼라바 잠비아 외교장관을 만난다.

박근혜 대통령도 5월 2일 이란 방문(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한반도에서 핵무기가 없어지는 것이 우리의 기본 원칙”), 5월 29일 우간다 방문(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 “북한과의 군·경 협력 중단”)을 통해 대북 압박에 성과를 거뒀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16일 프랑스에서 한·프랑스 국방장관 회담을 열고 추가 대북제재를 논의했다.

외교부 핵심 당국자는 “올 들어 50여 개국 및 국제기구가 북한과의 고위 인사 교류, 외교공관 개설, 협력사업을 재검토했다. 한마디로 ‘북한과 굳이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나라가 많아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외교력이 지나치게 북핵 대응에만 집중됐다는 불만도 나온다. 현지 공관 업무 수행 평가항목에 북핵 압박 외교실적을 반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재외공관에서 근무하는 한 외교관은 “주재국 외교부 사람들이 ‘한국 사정은 알겠지만 만날 때마다 북한 이야기만 하느냐. 다른 중요한 이야기도 좀 하자’고 해 민망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외교관은 “외교는 주고받기다. 북핵 문제에서 협조를 받으면 앞으로 ‘청구서’가 날아오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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