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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의 신명품유전] 현대 설치미술 뺨치는 조선시대 고지도

중앙일보 2016.06.1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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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종이에 목판 채색, 각 30.5X20㎝ 22첩, 총 6.7mX3.8m, 1861. [사진 K옥션]


오방색 때깔이 은은하고 부드럽다. 중간 색조로 전면을 다스린 격이 보통이 아니다. 지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놀랍다. 솜씨 좋은 장인의 재주가 번득인다. 별다른 설명이 없다면 한반도를 주제로 한 설치미술로 볼 수도 있겠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66 추정)가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다.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로서 지도를 가장 많이 만든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 채색 ‘대동여지도’는 오는 28일 열릴 K옥션 여름 경매에 나온다. 추정 가격은 22~25억 원이다. 22첩 완질(完帙) 인데다 인쇄한 뒤 각 군현(郡縣)에 채색을 해 그 범위와 경계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한 점이 값어치를 높인다.

군현 별 채색지도는 미국 밀워키 대학과 하버드 옌칭 도서관 소장본을 포함해 모두 3부가 남아있는데 이번에 국내에 있던 유일한 1점이 나온 것이다. 현재 20여 개 기관과 박물관이 ‘대동여지도’를 소장하고 있지만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없기에 이 민간 컬렉션의 경매는 마지막 소장 기회로 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신사동 K옥션 전시장에서 열린 ‘대동여지도’ 특별 강연에서 고서 전문가인 김영복(61) 고문은 “지도를 열어 찬찬히 오래 들여다보니 이 채색은 김정호가 직접 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표지에 ‘대동여지도’라는 제목의 목판 인쇄본이 없고, 김정호가 그림에 조예가 있었다는 기록에 따른 추측이다. 김 고문은 “고산자가 목판본 지도를 팔다가 남은 것에 본인이 시험 삼아 책을 칠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진한 색을 피해서 눈이 피로하지 않고 오래 볼수록 빛을 발한다.

고산자는 불과 150여 년 전 사람이지만 생몰 연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이 없다. 그가 만든 지도와 지지(地誌) 대다수가 전해지는 데 비하면 희한한 노릇이다. 중인(中人) 계급도 안 될 정도로 미천한 인물일 것으로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줄기 중심으로 지세(地勢)를 그려낸 정확함이 요즘 지도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데다 판각의 정교함이 놀라우니 신분을 뛰어넘은 재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들고 다니며 보기 쉽게 분책을 한 실용성, 사농공상 모두 우리 땅을 자세히 알면 좋을 것이라고 대량 공급한 공공성에 예술미까지 갖춘 점을 생각하면 시대를 앞서간 고산자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로 나섰던 철학자 최한기는 “나의 벗 김정호는 소년 시절부터 지리학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폈다”고 ‘청구도(靑邱圖)’ 머리말에 썼다. 우리 땅을 정확히 그려내겠다는 집념의 성정이 지도 한 장을 보물로 끌어올렸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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