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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우리는 소통하고 있는가?

중앙일보 2016.06.18 00:01 종합 24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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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일상의 예를 들어 보자. 아내가 옷을 고르며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가정하자. “오늘 정장하고 갈까? 간단히 입고 갈까?” 대답엔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둘 중에 하나를 골라 “당연히 정장이지”라고 건조하게 대답하는 남편도 있을 테고 “당신은 어떻게 입어도 다 예쁘다”고 능숙한 대답을 하는 전문가(!)도 있을 것이다. 혹은 내포된 뜻을 헤아려 “고생하면서 옷 살 여유도 없었지? 미안해, 우리 옷 사러 한번 가자”고 대답하는 남편도 있을지 모른다.

정답은? 모든 대답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문을 이해하고 질문의 차원에 대해 반응한 것이 가장 맞는 대답이다. 세 가지 유형의 답변을 도식적으로 구분하긴 쉽지 않지만 위의 첫 번째 대답은 내용(content)에 대한 반응이다. 만약 참석하는 행사의 드레스코드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질문이었다면 내용에 대해 답하며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적절하다.

두 번째 대답은 감정(emotion)에 대한 반응이다. 질문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느낌에 대해 응답한다. 선택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며 마음의 지지를 요청하는 질문이었다면 그 감정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적절하다. 세 번째는 의미(meaning)에 대한 반응이다. 새 옷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질문이었다면 맥락을 이해하고 내재된 뜻을 헤아리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실수한다. 옷차림을 지지받고 싶은 정서 차원의 질문에 “공식적인 자리니 정장을 하라”는 대답은 불필요한 조언이나 다를 바 없으며, 어떤 복장이 적절한지 정보를 묻는 질문에 대해 “무얼 입어도 예쁘다”는 대답은 황당한 동문서답이다.

타인과 여러 차원의 복잡한 메시지를 주고받기에 때론 이해하고 때론 오해하곤 한다. 의사소통의 첫 출발은 말한 이가 전달하고자 한 차원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것이며, 이에 맞게 반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내용에 대한 질문에는 구체적인 정보로, 감정에 대한 표현에는 공감으로, 의미를 담은 이야기에는 깊은 이해로 답하는 것이 소통이 아닐까.

가슴 아프게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겠기에 일상의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희생된 푸른 청년의 가슴 아픈 사연.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컵라면을 가방에 넣고 다니게 만든 비인간적 구조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감정에 대해 그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할 이들은 제대로 귀를 기울였을까.

강남역 10번 출구, 이 시대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억압에 대한 슬픔과 분노의 마음을 우선 이해해야 했건만, 우리 시대의 담론은 정신질환의 차원이냐 여성차별의 차원이냐의 논의로 순식간에 옮겨 정작 인간이 소외되게 반응한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아픔의 정점인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자식을 잃은 그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야 했음에도 왜곡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며 본질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이 우리 시대의 민낯이 아니었던가.

어디 감정만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이랴. 이 시대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할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라는 당연한 요구에 대해서는 마음을 합하면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감정의 동문서답을 해왔던 게 이 시대 위정자들이 아니었던가.

경청과 이해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상담학자 제롬 보자르스는 상담가의 치료기술보다도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 존중받았는지가 치료 효과와 만족도에 더욱 큰 영향을 준다고 지적한다. 비단 상담만의 일이랴.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해줄 수 있는 어떤 대단한 충고와 해법보다도 이야기와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존중이 우선 중요한 핵심이다.

인간에게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그리고 무관심이야말로 비인간적 감정이라는 버나드 쇼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경청도 공감도 이해도 존중도 희미해져 가는 시대. 구의역과 강남역을 지나며 여전히 메아리치는 포스트잇의 절규를 들으며 자문한다. 과연 우리는 동료 인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이 시대 우리는 소통하고 있는가. 아니 소통하기를 원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

송 인 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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