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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의 서사, 독일 통일을 다시 본다

중앙일보 2016.06.1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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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의 서사-독일 통일을 다시 본다
김영희 지음, 창비, 424쪽, 2만5000원

독일이 통일된 지 벌써 27년째다.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여전히 귀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독일은 우리와 상황이 다르므로 더 이상 벤치마킹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그것은 단견이다. 무엇을 배워야할 지 정확히 짚어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출간된 독일 통일 관련 책이 10여 권 있지만 대개는 1989년 11월의 베를린장벽 붕괴를 전후한 시기에 집중돼 있다. 또 서양에서 나온 책들은 개별적인 사안을 세부적으로 파고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제문제 전문 대기자로 오래 활동해온 저자가 착목한 것은 이 지점이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독일 통일의 알파와 오메가를 제대로 보여주자는 것. 아직 통일의 시동도 제대로 걸리지 않은 우리가 독일에서 배워야 할 것은 통일의 마지막 관문에서 벌어지는 환호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책은 미국·유럽과 한국을 통틀어서 나온 유일한 독일 통일의 전 과정을 다룬 통사(通史)다.

독일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통일에 대해 물으면 ‘행운’이란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2014년 3월 메르켈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독일 통일은 행운이었다”고 했다. 그에 앞서 동방정책의 설계자이자 ‘독일의 키신저’라고 불리는 에곤 바도 그렇게 표현했다. 2013년 펴낸 『빌리 브란트 회고』에서 그는 “독일이 한국처럼 민족분단이 오래 계속되어 분단이 고착되는 비극을 면한 것은 행운”이라고 했다. 그냥 단순한 수사는 아닐 것이다.

행운은 압축된 표현이다.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복잡다단한 장기적 과정을 과연 뭘로 표현할 것인가, 거대한 구호보다는 작은 실천이 하나 둘 쌓이고 쌓여 이뤄지는 그 지난한 이심전심의 코스를 뭐라고 설명해낼 것인가. 그들이 말하는 행운이란 말의 압축 코드를 다시 푸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 책이 그 출발점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 80세의 현역 기자인 저자의 숙성된 경험은 책의 곳곳에서 빛을 낸다. 우선 글쓰기다. 독일 통일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세계사로도 읽히는 책이지만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실제 저자는 『소설 하멜』을 비롯해 여러 편의 소설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각종 자료를 교차하며 독일 통일의 과정을 재구성해 놓았음에도 전혀 딱딱하지 않게 읽힌다.

게다가 중요한 정책이나 사건에 대해 서술을 하고 나면 반드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비교해 놓았다. 에곤 바가 타계 직전에 저자와 했던 최후의 인터뷰를 비롯해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등 독일 통일과 직접 관련된 세계적 리더들과의 인터뷰 등에서 우러나오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는 책의 재미를 더해준다.

‘서방정책-동방정책-동서독 통일협상’은 저자가 독일 통일의 암호를 푸는 세 개의 큰 줄기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독일이 다시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 포용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추진한 서방정책(1949~63)이었다. 서방정책의 성공적 기반 위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로 시선을 보낼 여유를 갖게 됐다. 동서독 통행증협정 체결 같은 분단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에서부터 시작해 동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외교정책을 빌리 브란트-에곤 바 콤비가 이끌어가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이자 예술을 보는 듯하다. “통일은 모스크바에서 시작한다” “접근을 통한 변화” 등의 말의 향연을 펼치며 통일의 가치를 구현해간 에곤 바와 같은 전략가가 우리에겐 없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헬무트 콜 총리가 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 통일 저지를 돌파하기 위해 펼친 초인적 외교력이다.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진 소련과 동구권의 와해는 분명 독일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준비된 행운’이었고 노력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은 준비하되 말하지 않는다”는 아데나워·브란트·콜 총리의 정파를 넘어선 깊은 사려, “큰 담론보다는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는 에곤 바의 통찰과 실천 등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운이기 때문이다. 통일은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인데,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외적 조건에 대한 속 깊은 통찰이 우선 필요해 보인다. 분단 국가의 화해에 대한 에곤 바의 언급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는 “가치와의 화해”를 이야기했다. 그 의미를 저자가 구체적으로 묻자 이렇게 답했다. “누가 더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가 계산하지 말아야 해요. 통합에 가치를 두라는 말입니다.”
 
통일과 평화, 어느 것이 먼저일까. 닭과 알의 순서를 따지는 수수께끼 같은데 저자는 평화의 손을 먼저 들었다. 저자가 볼 때 남북한 ‘우리 민족끼리’의 통일은 환상이다. 평화를 건너 뛴 통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통일 정책이 남북한 대화·화해·협력의 축적을 골격으로 해야 한다는 얘기다.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 핵이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첫 단계로 저자는 ‘핵 모라토리엄’을 제시한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고 평화체제가 휴전체제를 대체하면서 한반도 양국과 주변국들이 서로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 모라토리엄을 비핵화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드(THAAD) 배치 문제 같은 경우엔 그야말로 지혜가 필요한데 일단 가능한 시간을 길게 끌며 미·중 양국의 체제경쟁을 활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저자는 조언한다. 장기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해 한반도 주변 4강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야한다고 했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평화적 교류를 재개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당국 간 고위급 접촉뿐 아니라 민간 분야 교류의 활성화가 필수적이다.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을 통해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빌리 브란트의 평화에 대한 인용으로 저자는 끝을 맺는다.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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