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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폐렴 고통받는 3·4등급 309명도 지원을

중앙일보 2016.06.17 02:21 종합 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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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임신한 아내와 태아를 잃은 안성우씨가 15일 ‘살균제 피해 사진전’이 열리는 서울시민청에서 옥시 제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사진 김성룡 기자]


“경호는 엄마 배 속에서 8개월간 가습기 살균제를 속수무책으로 흡입했어요. 그래서 폐 미성숙으로 태어났고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 됐는데 살균제 피해자 심사에서는 4등급(단계)이에요. 이게 말이 되나요?”

폐섬유화만 인정한다는 정부
뇌성마비 1급 장애인 돼도 4등급
의료비 지원, 기업 보상서 제외


모환우(47)씨는 아들 경호(15)만 보면 미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고 했다. 모씨의 아내는 2001년 3월 경호를 임신한 뒤 8개월간 가습기 살균제를 썼다. 매연도 피하자며 조심하던 아내였다. 비극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임신 4개월째 동네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숨쉬기 어려워한다’는 얘기를 했고 6월에는 ‘이대로 안 된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 4개월간 대형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받았는데 상태는 더 악화됐다. “태아가 호흡을 못해 태중에 있으면 안 된다”는 말에 급히 제왕절개를 했다. 폐 미성숙아로 태어난 경호가 처음 간 곳은 엄마 품이 아닌 중환자실이었다.

이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경호는 출생 3개월 만에 MRI(자기공명영상촬영)를 찍었고 2004년 뇌성마비 1급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호흡 때문에 뇌손상을 입었다”고 했다. 겨울마다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달려가고 새벽에 호흡곤란이 오면 부랴부랴 응급실로 달려가는 생활이 2~3년간 계속됐다. 경호는 지적 능력이 떨어져 또래보다 학교를 2년 늦게 입학했고 그나마도 2교시를 마치면 조퇴해야 했다. 매일같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해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모씨가 버는 돈은 족족 아들의 병원비로 들어갔다. 힘든 생활을 못 견딘 모씨 부부는 자주 다퉜다. 결국 2011년 부부는 이혼했고 모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양육을 도맡게 됐다.

가습기 살균제가 경호의 폐를 망가뜨렸다는 걸 알게 된 건 10년이 지난 2011년이었다. 모씨는 답답한 마음에 피해자 신청을 했다. 결과는 4등급 피해자. 가습기 살균제와 폐손상 간 관계가 거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그는 “살균제가 태아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인데 정부는 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다”며 “우리의 아픔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중 3, 4등급 판정을 받은 이들은 한 맺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가습기 살균제를 써 중증 피해를 봤는데도 ‘폐섬유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의료비 지원에서 배제됐다. 정부의 지원, 기업의 배상·보상도 모두 1, 2등급 피해자 대상으로 진행된다. 3, 4등급 피해자들이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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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손상위원회는 피해자를 1~4등급으로 분류하는 데 살균제와 폐질환의 연관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질환의 경중과 관계없이 폐섬유화가 확인돼야 1, 2등급을 받을 수 있다. 폐가 아닌 다른 호흡기 질환을 가진 피해자는 3, 4등급 판정을 받는다.

하지만 3, 4등급 중에서도 살균제 관련 피해로 보이는 중증 호흡기질환, 뇌성마비 등으로 고통받는 피해자가 많다. 이미 3, 4등급 피해자 309명 중 48명이 사망했다. 김태종씨는 “아내는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현재 폐가 10~12% 남아 있는 상태라 24시간 산소통을 끼고 살고 있다”며 “이런데도 정부는 기존에 폐질환이 있었고 폐섬유화 질환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3등급 처리를 했다”며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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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살균제가 폐에만 영향을 끼쳤다’는 가정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살균제에 포함된 화학물질이 호흡기 전반, 피부, 눈 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의 독성을 연구한 임종한 인하대 교수는 “살균제의 독성물질이 간·신장 등 다른 장기에도 손상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동물 실험 결과 유해성분이 태반을 통과해 태아에게 전달됐을 가능성도 큰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백도명(서울대 교수) 폐손상위원회 공동위원장은 “당시 많은 사람을 죽게 한 원인이 중증폐질환, 말단기관지의 염증이었고 이 때문에 폐섬유화를 기준으로 피해자를 판단했던 것”이라며 “추후 천식, 비염, 상기도질환 등 살균제의 독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질환들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채윤경·손국희?정진우·윤정민·송승환 기자 pch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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