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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적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기에 자결" 충신 이범진 순국비에 헌화

중앙일보 2016.06.1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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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14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묘지에 있는 이범진 공사 순국비에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외교부 공동취재단]

 

황제 폐하.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1911년 1월 26일. 대한제국의 초대 주러시아 상주공사였던 이범진(1852~1911)은 고종에게 이런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맸다. 이역만리에서 망국의 소식을 접하고 그가 느꼈던 참담함과 분노가 그대로 담겼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항거해 자결한 이 공사의 순국비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14일(현지시간) 찾았다.

대한제국의 초대 주러시아 상주공사 이범진
을사조약 이후에도 현지에 남아 구국외교 계속
고종 밀서 전달, 연해주 항일무장투쟁 지원
윤병세 ‘국익 위한 외교’ 다시 새기려 순국비 방문


윤 장관은 이날 오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북방묘지에 마련된 이 공사의 순국비에 헌화했다. 순국비에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라고 쓰여 있었다.
헌화를 마친 뒤에도 윤 장관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순국비를 응시했다. 현지 관계자에게 순국비 관리 현황 등을 묻기도 했다.

이 공사의 묘는 75년 북방묘지 재정비 과정에서 무연고라는 이유로 없어졌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한국 정부가 그가 묻혔을 것이라 추정되는 곳에 2002년 7월 순국비를 세웠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공식 방문 때 순국비에 헌화한 적이 있다. 외교장관 차원에서의 방문은 처음이다. 2박3일간의 빡빡한 러시아 방문 일정 중에도 이 공사의 순국비를 찾은 것은 윤 장관이 직접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망국의 지경에도 구국외교를 계속하다 자결로 항거한 이 공사를 통해 우리의 굴곡진 근대사를 되새기고, 확고히 국익을 좇는 외교를 해야 한단 점을 다시 강조하자는 것이 윤 장관의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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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초대 주러시아 특명전권공사였던 이범진. [사진 국가보훈처]

이 공사는 아관파천(1896)을 주도한 구한 말 친러파의 거두였다. 동북아역사재단과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아관파천 이후 이 공사는 법무대신 겸 경무사로 임명됐고, 일제가 낭인들을 보내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

일본인들을 무혐의로 처리한 친일 내각의 발표 내용이 허위임을 밝혀내 관련 내용을 외신과 잡지에 배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적극적인 수사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고, 도리어 일제의 위협을 받게 됐다.

그가 주러시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것은 1901년 1월이었다.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키워 일제를 배격하는 것이 그의 현지에서 ‘구국외교’에 전념한 목표였다. 하지만 러·일전쟁(1904) 발발 이후 외교환경은 더욱 어려워졌다. 대한제국 외무부를 장악하고 있는 일제는 수차례의 본국 소환 명령을 내렸고, 이 공사가 이를 거부하자 파직시켜버린다.

고종으로부터 “귀환 명령은 일본의 압박에 따른 것이므로 러시아에 남아라”는 밀서를 받은 이 공사는 을사조약(1905) 체결로 인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에도 공관을 지켰다. 러시아 정부도 이 공사의 노력을 인정, 계속 체류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체류비도 지원했다.

사실상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뒤에도 이 공사는 다각적인 외교활동을 계속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을 막기 위해 러시아의 개입을 요청하는 고종의 밀서를 수차례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전했다. 고종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을 때도 후견인 역할을 자청했다. 헤이그 특사단에 외국어에 능통한 아들 이위종을 합류시키기도 했다.

1908년 봄 연해주에서 최재형 선생과 이범윤 선생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만들 때 이 공사는 군자금을 대면서 이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동의회는 안중근 선생이 몸담았던 조직이다. 전주 이씨 집안의 아우이기도 한 이범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공사는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몰아쳐 서울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항일무장투쟁을 독려했다.

하지만 백방의 노력도 이미 기울어진 국운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공사는 1910년8월 경술국치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맞았다. 이 때는 이미 러시아가 일본을 의식, 연해주에서의 의병활동을 탄합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고종이 추진하던 러시아 망명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이 공사가 자결을 택할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남은 유산을 미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단체에 나눠준 그는 마지막까지 충신이라 부를만 했다. 이 공사의 이런 항일활동은 지금도 외교부 직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곤 한다.

유지혜 기자, 상트페테르부르크=외교부 공동취재단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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