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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군인정신 오래 기억됐으면”

중앙일보 2016.06.15 01:03 종합 23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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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개 변호사는 “많은 이들이 아버지를 포용력 크고 담대한 성품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사진 김춘식 기자]


“국란 때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죽임을 당했는지 알고 있니? 북의 남침 기도를 사전에 보고했는데도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이건개 변호사, 호국강연회 열어
6·25 때 순국한 이용문 장군 추모
“마지막 효도라는 생각으로 마련”


6·25 전쟁 발발 3개월 뒤, 잃었던 서울을 되찾은 1950년 9월 28일. 당시 대령이던 고(故) 이용문 장군(소장 추서)이 서울 연건동 은거지에서 나와 북아현동 집으로 향하면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 건개의 손을 잡고 한 말이다. 법무법인 주원의 이건개(75) 대표변호사는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는 “총성이 곳곳에서 들렸고 거리에는 시신이 즐비했다”며 “바로 직전 은거지에 들이닥친 북한군에 의해 아버지가 총살당할 뻔한 위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고 김정자 여사)가 뛰쳐나와 북한군의 총구를 가로막으며 ‘날 대신 쏘라’고 울부짖자 북한군이 공포탄만 쏘고 사라졌다”고 기억했다.

이 변호사의 잘록한 오른손 약지는 아버지를 기리는 징표다. 6·25 직전 국군 정보국장이던 이 장군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사찰 요구에 반대하다 눈 밖에 나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신분으로 전쟁을 맞았다. 일본군에서 태평양 전쟁을 치렀던 이 장군은 독전요원으로 서울 방어선에 투입됐다. 전멸 위기에도 퇴각을 거부하다 고립된 이 장군은 9·28 수복 때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냈다.

이 변호사는 “어느 날 밤 들이닥친 북한군이 제 손을 짓밟았지만 온돌 밑 토굴에 숨은 아버지가 들킬까봐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오른손 약지는 그때부터 못 쓰게 됐다. 이 장군은 작전국장 재직시절인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내각제 추진 세력을 체포하라”는 이 전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했다. 그 뒤 심한 질책을 받고 후방으로 밀려난 이 장군은 이듬해 6월24일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도중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이 장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호국·안보 강연회가 16일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열린다. 이 장군 평전 『젊은 거인의 초상』의 재간행 출판기념회를 겸한 자리다. 이 변호사는 “마지막 효도라는 생각으로 마련한 자리”라며 “인간애에 뿌리를 둔 아버님의 군인정신이 국민에게 오래 기억됐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글=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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