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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가 만난 사람] 3번의 산업혁명, 3번의 변신…125년 필립스 이번엔 헬스케어

중앙일보 2016.06.15 00:01 경제 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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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서울 한남동 필립스코리아 사무실에서 만난 로날드 드 용 필립스 부회장은 “4차 산업혁명의 급격한 변화에 맞서려면 특정 산업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고심 끝에 TV 사업을 팔고 조명 사업을 분리했다.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건강 관리를 하는 헬스테크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사진 필립스]


혁명이란 단어는 파괴란 뜻을 품고 있다. 인류에게 찾아온 네 차례의 산업혁명 역시 늘 기존 산업의 붕괴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탄탄하던 기업이 급격한 산업 구조의 변화를 이기지 못해 수도 없이 사라졌다.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는 그런 면에서 교과서적인 기업이다. 설립 125년, 세 차례의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변신을 거듭하며 세계적 기업의 위상을 유지했다.

한국 온 로날드 드 용 부회장
탄소 전구 → 라디오·TV → 반도체
시대가 원하는 쪽으로 계속 변신


필립스 변신의 역사는 산업혁명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전기의 발명과 함께 찾아온 2차 산업혁명 시기, 탄소 전구를 만들며 사업을 시작했다. 대중 매체 확산기를 놓치지 않고 라디오·텔레비전 사업에 뛰어들어 세계적 회사로 성장했다. 3차 산업혁명으로 정보기술(IT) 산업이 성장하자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LCD패널 등 첨단 기술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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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기술(ICT)이 몰고 온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필립스는 또 한차례 대대적인 변신을 한다. 2006년 경쟁력이 뒤처지던 반도체·휴대전화·오디오 사업을 매각하고, 2012년 TV 사업도 처분했다. 2013년엔 아예 회사 이름에서 ‘전자’를 떼어냈다.

이제 필립스는 매출의 절반 정도(46%)를 의료기기 판매 등으로 올리는 헬스케어 회사다. 디지털플랫폼을 활용해 원격진료와 가정 건강 관리를 할 수 있는 맞춤형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과감한 변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로날드 드 용 필립스 부회장은 “항상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특정 산업에 집중하지 않고선 4차 산업혁명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필립스 본사의 글로벌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용 부회장을 10일 서울 한남동 필립스코리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2011년 부회장으로 선임된 그는 프란스 판 하우턴 현 회장과 함께 기업 구조 개편 작업을 추진해왔다.
 
산업 구조가 급변하고 있다. 필립스의 구조조정 속도가 빠르다.
“우리는 구조조정(restructuring)이라 부르지 않는다. ‘엑셀러레이트(accelerate·가속화)’라는 이름의 변신(transformation) 작업이다. 한국말로 하면 빨리빨리다. 치열한 고민 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여러 업종을 거느리는 기업 구조에서 벗어나서 헬스케어에 집중하는 기업으로 변신하자. 125년 동안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는 이런 고민을 끝없이 했기 때문이다. 기업으로서 스스로를 ‘재발명(reinvention)’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쳤다.”
가장 어려운 결단은 뭐였나.
“2012년에 TV 사업을 판 것이었다. 필립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이었다.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올해 조명 회사를 분사하는 것도 과감한 결정이었다. 우리가 전구 회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애착이 컸다. 밝은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는 세계가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가 늘 고민한다. 우리의 답은 헬스케어다. 인구는 늘고 빠르게 늙어간다. 많은 이들이 큰 비용 들이지 않고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 우리가 찾은 임무다.”
집중은 한국의 대기업 그룹도 새겨들어야 할 결론 같다.
“한국엔 훌륭한 기업이 많아 감히 조언하기 어렵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4차 산업혁명은 생각보다 더 파괴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는 것이다.”
버릴 사업과 집중할 사업은 어떻게 결정하나.
“사업 구조를 개편할 땐 두 가지를 따져본다. 어디서 싸울 것인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 사업의 전망을 판가름하는 게 ‘어디서’에 해당한다. 시장 전망은 어떤지, 그 산업에서 어떻게 가치를 창출할지 계산한다. 우리의 경쟁 우위를 따지는 게 ‘어떻게’다. 우리가 경쟁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렇게 내린 선택이 지금까지는 맞아 들어가고 있나.
“그렇게 생각한다. (2006년 매각한) 반도체 부문에선 우리가 세계 3위에 들지 못했다. 치고 나가려면 엄청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반도체는 경기를 심하게 타는 업종이었다. 차라리 전담 경영진을 따로 두고 우리는 투자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매각했다. 그 결과 탄생한 NXP라는 회사는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TV를 매각한 것도 잘한 결정이었다. TV 산업이 앞으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 TV 제조업체 중에 고전하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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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케어를 택한 이유는.
“일단 인구학적으로 큰 수요가 생길 거라 봤다. 게다가 우리는 환자 모니터링이나 중환자 관리 등 의료기기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수면 무호흡증이나 만성폐쇄성호흡질환 등을 치료하기 위한 가정용 기기도 경쟁력이 있다. 앞으로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더 많은 건강관리 서비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하우턴 회장이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유럽 기업은 게으르다. 빠른 아시아 기업을 배워야 한다”고 공공연히 역설했다는데.
“정확히 하고 싶다. 유럽 기업이 게으르다고 말하진 않은 것 같다. 덧붙여, 필립스는 스스로 유럽 기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글로벌 기업이다(웃음). 필립스 직원들은 정말 열심히 일한다. 아시아 기업의 빠른 실행력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건 맞다. 한국 기업을 보자. 수십년 간의 발전상은 어떤 기준으로 보건 놀라울 따름이다. 이 빠른 추진력을 배우려 한다.”
한국 기업들은 실리콘 밸리의 혁신을 배우고 싶어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실리콘 밸리에는 실패해도 좋으니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하자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 네덜란드를 포함해 많은 나라가 배워야 할 문화다. 필립스는 유럽 기업의 인간 중심 문화, 아시아 기업의 빠른 추진력, 미국 기업의 도전 정신, 이런 걸 모두 본받으려 한다.”
면도기나 에어프라이어 등 소형 생활 가전이 많아 혁신적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란 이미지가 덜한 것 같다.
“혁신을 좁게 해석해선 안된다. 혁신은 제품이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 사업 구조 등 모든 면에서 필요하다. 제품 생산 기술이 다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면도기 하나에도 엄청난 혁신이 필요하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우리 디자인팀은 제품만 디자인하는 게 아니다. 고객을 어떻게 대할지, 문제가 생겼을 때 보상은 어떻게 해줘야 할지까지 디자인팀이 고민한다.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사업 조직까지 개편한다. 우리 디자인팀이 세계 최강인 이유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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