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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8 - 예수가 직접 말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8 - 예수가 직접 말한 천국의 문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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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둘이 아니었다. “주님! 주님!”하며 예수를 쫓았던 유대인들. 그들은 대부분 ‘이적’을 기대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맨발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파 했다. 그걸 통해서만 ‘메시아’란 사실을 믿으려 했다. 그들에게 1순위는 예수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복음이 아니었다. 그들의 1순위는 이적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의 성화가 오죽했을까. 성서에는 그들을 향한 예수의 직설적인 꾸지람이 기록돼 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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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믿음의 방향이 엉뚱한 이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기도 했다. 엘 그레코의 1595년작 ‘성전정화’.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깜짝 놀랄 일이다. 지금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도식적으로 믿는 이들은 많다. 심지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도 하나같이 “주여! 주여!”하며 예수를 따른다. 그렇게만 따라가면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여긴다. 이미 자신의 이름이 박힌 ‘천국행 티켓’이 예약돼 있다고 믿는다.

예수는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고 했다. “주여!” “아멘!”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친다고 모두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2000년 전, 예수에게서 그 말을 직접 들은 유대인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절대 공식을 부정하는 예수에게서 낭패감을 맛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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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속의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주여! 주여!’ 하는 외침에 있지 않다고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85년작 ‘성경이 있는 정물’.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우리는 쉽게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되묻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의 의미가 뭔가. 네가 생각하는 ‘믿음’은 뭔가.” 오히려 그렇게 되묻는다.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이렇게 답을 건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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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임제사에 있는 전각의 현판에 ‘不二(불이)’라고 적혀 있다.

불교에도 문(門)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름은 ‘불이문(不二門)’. 그 문을 통과하려면 조건이 있다. 깨달음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둘이 아니어야 한다. 차안(此岸ㆍ속세의 땅)과 피안(彼岸ㆍ깨달음의 땅), 그 둘의 속성이 통해야 한다. 그래야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불이(不二)의 문(門)’이다.

사람들은 투덜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의 말 때문이다. 그게 ‘천국의 문턱’을 한껏 높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대폭 줄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높은 기준치를 들이대면, 누가 그 문턱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따진다.

그게 아니다. 예수는 엉뚱한 곳을 향해 엉뚱한 방식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일러줬을 뿐이다. “그쪽으로 가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라고. 그리로 가면 서울이 아니라 광주라고. 그런 식으로는 서울에 갈 수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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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테르 브뢰헬의 1568년작 ‘맹인이 맹인을 인도함’. 나폴리 카로디몬테 미술관 소장.


예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이정표까지 일러주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비로소 천국에 간다”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의 지적은 ‘천국의 문턱’을 높인 게 아니다. 오히려 문턱을 낮춘 셈이다. 부산으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서울로 불렀고, 어떡해야 서울로 입성할 수 있는지 계단까지 놓아주었다. 그건 예수가 제시한 일종의 ‘나침반’이다.

‘예수의 나침반’을 행동 강령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성서 속 예수의 메시지는 맹목적인 행동 강령이 아니다. 무작정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데만 치중하다가 자칫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만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그들도 구약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문자적으로 행하다가 형식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럼 예수는 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이치가 녹아 있다.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하는 방법과도 통한다. 우리는 땅에 있다.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다. 하늘의 속성과 아버지의 속성은 통한다. 하늘이 곧 아버지니까.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는 하늘의 속성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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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1644년작 ‘다친 자를 치료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우리는 아버지를 닮게 된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실행하면 어찌 될까. 땅에 선 우리가 하늘의 뜻을 실행하면 어찌 될까. 그렇다. 속성이 바뀐다. 우리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을 닮아간다. 그걸 통해 간격이 좁아진다. 아버지와 나, 그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나의 속성’이 ‘아버지의 속성’과 갈수록 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복음 7장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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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하늘과 하나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하늘의 뜻을 행하면 된다. 그럼 바다의 속성이 하늘의 속성을 닮게 된다. 팔복교회에서 바라본 갈릴리 호수.

만약 “주여! 주여!”만 하다가 하늘 나라에 간다면 어찌 될까. 우리는 천국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나의 속성’과 ‘천국의 속성’이 엄연히 다른데도 말이다. 나는 바다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을 생각한다. 기름은 바다와 하나가 되지 못한다. 속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다 한가운데 떠있어도 바다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천국도 마찬가지 아닐까. “주여! 주여!”만 외치다가 천국에 갔다고 하자. 나의 속성과 천국의 속성은 여전히 다르다. 그때는 물 위에 뜬 기름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도 내가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예수는 누차 강조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속성’을 체화하라고 말이다. 그걸 통해 속성을 바꾸라고 말이다. 그렇게 ‘불이문(不二門)’을 지나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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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 정면 위쪽에 예수와 천국의 열쇠를 든 베드로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천국을 바라보고, 천국을 열망한다. 그곳의 문을 여는 열쇠는 뭘까.

고(故) 옥한흠(1938~2010) 목사는 복음주의 영성을 지향했다. 생전에 그는 ‘한국교회 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 대표 설교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멘!’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땅의 복도 다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사람들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를 지적하면 예배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집니다.”

이 말끝에 옥 목사는 “이놈이 죄인입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됐다”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

옥 목사는 개신교계 안팎에서 지금도 가슴으로 존경받는 목회자다. 그의 목회와 설교는 늘 ‘십자가’를 찾았다. 서울 강남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교회(사랑의교회)를 일군 뒤에도 ‘십자가 설교’는 바뀌지 않았다. 그런 옥 목사도 “죄를 얘기하고, 회개를 얘기하고, 십자가를 얘기하면 성도들이 불편해 하더라. 그런 성도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설교가 바뀌더라. 주일 설교에서 ‘자기 십자가’가 점점 빠지게 되더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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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가다가 쓰러진 곳이다. 그곳에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조각상이 있다.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다. 예수는 아예 ‘좁은 문(the cramped gate)’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 문으로 가라고 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오는 이들이 적다.”(마태복음 7장13~14절)


예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문은 늘 좁다. 문만 좁은 게 아니다. 거기에 이르는 길까지 비좁다. 그래서 찾아오는 이들이 적다. 궁금하다. 사람들은 왜 넓은 길을 선호할까. 왜 넓은 문을 좋아할까. 예나 지금이나 이유는 똑같다. 내려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둔 것들을 몽땅 실은 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이 넓어야 좋고, 문이 넓어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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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일러준 ‘좁은 문’은 일종의 이정표다. 천국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일러준다.

좁은 길은 다르다. 비좁고 가파르다. 그곳을 지나려면 뭔가를 내려놓아야 한다. 무게를 줄여야 하니까. 가벼워져야 하니까. 그래야 지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무게를 내려놓는 방식이 ‘자기 십자가’다. 예수는 그걸 짊어진 채 나를 따르라고 했다. 우리의 눈에는 온통 가시밭길이다. 예수가 말한 ‘좁은 길, 좁은 문’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피하고 싶다. 굳이 이 길을 택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사서 고생일 테니까. 그래서 넓은 길이 좋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넓은 문이 좋다.

그래서 우리는 ‘단 것’을 좋아한다. ‘쓴 것’은 싫어한다. 그래서 뱉어낸다. 입 안에 ‘쓴 것’이 들어오면 씹기도 전에 뱉어낸다. 그게 뭘까. ‘아버지의 뜻’이다. 그 속에 ‘하늘 나라의 속성(천국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러니 우리가 뱉어내는 건 무엇일까. 씹기도 전에 뱉어내고 마는 건 진정 무엇일까. 그게 예수가 직접 말한 ‘천국의 문’이다.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불이(不二)의 문(門)’이다. 우리는 지금도 서성인다. 그 문 앞에서 자꾸만 서성인다.

그렇게 서성이기만 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다시 말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복음 23장13절)


<19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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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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