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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산, 농협 ‘빅 배스’

중앙일보 2016.06.13 00:01 경제 1면 지면보기
조선·해운업종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농협금융그룹 경영에 비상등이 켜졌다. 시중은행처럼 발을 빼지 못한 채 대규모 여신이 물려 있는 데다 국책은행과 달리 손실을 스스로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급한 농협금융은 이참에 부실을 털어내 버리자는 입장이다.

시중은행 조선·해운 발 뺄 때 거꾸로 뛰어든 게 화근
농협 “공공성 강하다 보니 일찍 우산 빼앗지 못해”
부실 정리 땐 배당금 지급 못해…중앙회 설득이 과제

하지만 결정권을 쥔 중앙회 이사회가 이에 응할 지가 미지수다. 12일 농협금융에 따르면 다음달 1일자로 각 계열사의 교육·홍보 조직을 통폐합하는 조직 개편을 실시한다. 교육부서는 합쳐서 농협중앙회로 옮기고 은행·생보·손보의 홍보실은 지주와 합쳐진다. 농협금융 관계자는 “ 나머지 후선업무에 대한 조직 개편도 연말에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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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농협은행·각 은행·농협금융지주


농협금융이 허리띠를 조이는 건 사정이 워낙 급하기 때문이다. 농협은행이 보유한 조선·해운사 관련 여신 규모는 총 5조2002억원에 달한다. 올해 1분기엔 창명해운의 법정관리로 3000억원대 충당금을 쌓으면서 농협금융의 당기순이익이 35% 줄었다(전년 동기 대비). 2분기엔 STX조선해양의 법정관리로 인해 최대 6500억원의 충당금을 추가로 적립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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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농협은행·각 은행·농협금융지주


농협은 2012년 신경(신용·경제사업) 분리를 앞둔 2010년과 2011년 조선·해운 등 경기민감업종의 여신을 크게 늘렸다. 여신 심사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괜찮은 수익원이라고 보고 선수금환금보증(RG) 발급에 뛰어든 게 화근이었다. 금융지주 출범 뒤 다른 시중은행이 조선·해운사 지원에서 발을 뺄 때 농협금융은 오히려 국책은행과 함께 추가 지원에 동참했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시중은행과 달리 공공성이 강하다 보니 일찍 우산을 빼앗지(여신을 회수하지) 못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충당금을 미리 충분히 쌓아둔 시중은행과 달리 농협은행의 충당금 잔액은 고정이하 여신(3개월 이상 연체된 대출)의 81.55%밖에 되지 않는다. 조선·해운업의 부실로 인한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약하다는 뜻이다. 손실이 나도 정부가 보전해주는 국책은행과 달리 농협금융은 정부에 손을 벌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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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농협은행·각 은행·농협금융지주


지난달 초 김용환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부실을 한꺼번에 정리하는 ‘빅 배스(big bath)’를 공언한 것도 건전성이 위태롭다는 판단 때문이다. 김 회장은 “적자가 나더라도 한번 부실을 정리하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빅 배스의 규모와 시기는 아직 미정이지만 업계에선 2조원가량 들 거라는 추정이 나온다.

빅 배스는 농협금융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농협금융의 지분 100%를 보유한 농협중앙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중앙회 이사회를 설득하기란 만만치 않다. 대규모 충당금을 쌓아서 적자를 내면 농협금융이 중앙회에 주던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배당금은 중앙회에 출자한 지역 조합에 돌아가는 재원이다. 중앙회 이사회의 과반수(30명 중 18명)를 차지한 현직 조합장 이사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7월부터 이사 임기(4년)를 시작하는 K조합장은 “농민이 어려운데 배당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금융지주가 직원 인건비를 못 주는 한이 있더라도 배당은 100% 책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조합장 이사 Y씨도 “충당금 재원은 은행이 자체 경영 정상화를 통해 마련할 일”이라며 “이사회에서 (빅 배스가) 거론되면 적극 반대하겠다”고 말했다.

농협금융 관계자는 “7월에 새 이사진이 구성되면 빅 배스의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해 승인받을 예정”이라며 “배당금이 조합에 미치는 영향이 커 설득 작업에 시간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빅 배스 논란을 계기로 농협금융의 지배구조를 좀 더 투명하게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협금융은 지주 출범 이후 줄곧 사외이사의 4분의 3 이상이 ‘관피아’(관료+마피아)로 채워졌다. 그만큼 정부의 입김에 휘둘리고 감시·견제 기능이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종진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 상황에선 단위조합에 가는 배당금을 줄일 수밖에 없다”며 “이번 기회에 단위조합이 농협금융의 주인으로서의 권한과 경영진 감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빅 배스(big bath)=목욕을 세게 해 묵은 때를 한꺼번에 없애 듯 기업이 부실 요소를 한 회계연도에 모두 반영해 잠재적 부실까지 털어내는 회계기법 .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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