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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독일식 대화·타협·절충 시스템 받아들여야

중앙선데이 2016.06.12 01:18 483호 7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남경필(51) 경기지사와 김종인(76)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 모르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 정치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1897~1977)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는 사실이다.


독일 모델에 열광하는 정치인들, 왜?

에르하르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콘라트 아데나워와 함께 ‘라인강의 기적’을 이끌었다.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서독의 2대 총리다.



남 지사는 지난 4월 독일 출장 때 정부 청사에 걸린 에르하르트의 초상화를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러고는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사진을 보고 또 본다고 했다. 남 지사는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 시절인 2011년 통일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통일은 결과에 불과했고, 통일까지의 과정엔 연정(Koalition)과 사회적 시장경제(soziale Marktwirtschaft)를 축으로 하는 독일 모델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또 에르하르트와 같은 훌륭한 정치인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는 사실까지 깨달으면서 독일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에르하르트는 남 지사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멘토인 셈이다.



남 지사는 2013년 ‘대한민국 국가모델 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새누리당 동료의원들과 함께 독일 모델을 공부했고, 이때 배운 연정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경기 도정에도 도입했다. 야당에 부지사 추천권을 줬고, 경기도 소유의 토지와 예산 일부를 중소기업·소상공인 등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공개하는 ‘공유적 시장경제’를 실험하고 있다.



김종인, 에르하르트 갈망해 독일로 유학남 지사보다 25세 많은 김종인 대표. 지금으로부터 58년 전 당시 스무 살이 채 안 된 ‘청년 김종인’ 역시 에르하르트를 갈망했다.



“1958년 에르하르트가 한국을 찾았다. 경제학자인 에르하르트는 나치 치하에서 히틀러와의 협조를 거부해 대학에서 쫓겨났다. 혼자 경제학을 연구하면서도 그는 ‘히틀러가 반드시 망할 것인데, 그 이후 독일을 재건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그리고 실제로 세계대전 이후 소신을 갖고 경제정책을 펴 경제대국 독일을 만들어냈다. 그의 모습을 본 뒤 ‘나도 에르하르트처럼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유학지를 미국이 아닌 당시 서독으로 정했다.”



그는 독일 뮌스터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인 경제민주화의 뿌리도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다.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형평성도 같이 취하기 위해선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황준성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회적’이란 표현 때문에 사회주의를 연상하는 사람이 많지만 독일에선 기민당 등 보수세력이 먼저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세웠다”며 “완전 경쟁시장을 국가가 책임지고 만들면서 사회보장이나 복지제도도 함께 챙겨야 한다는 경제철학”이라고 소개했다.



“독일선 보수세력이 사회적 시장경제 앞장”김 대표가 최근 회원으로 가입한 모임이 있다. “2050년을 바라보고 교육·고용·복지·조세·행정 등 5개 분야의 과제를 공부하겠다”는 취지로 지난 7일 발족한 국회의원 공부모임 ‘어젠다 2050’이다. 김 대표 이외 새누리당 김세연·이학재·박인숙·오신환·주광덕, 더민주 조정식·이철희, 국민의당 김성식·김관영·오세정, 무소속 유승민 등 여야 의원 12명이 회원이다. 각 당에서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주로 참여했기 때문에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향후 개편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며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 모임을 관통하는 키워드 역시 ‘독일’이다.



모임을 주도한 김세연 의원은 “‘어젠다 2050’이라는 명칭은 독일의 ‘아겐다(Agenda) 2010’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아겐다 2010은 2003년 당시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주도한 노동·연금·의료개혁 프로그램이다. 과도한 복지를 줄이고, 방만한 연금구조를 고치며,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게 핵심이다. 노조를 기반세력으로 하는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는 아겐다 2010으로 결국 물러났지만 개혁의 성과 덕분에 독일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의원은 “독일 모델만을 연구하는 모임은 아니지만 한국도 아겐다 2010과 같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게 참여 의원들 전원의 뜻”이라고 전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임에 참여한 유승민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하겠다는 ‘사회적 경제 기본법’ 자체가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



정부가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을 위해 발전기금을 마련하고, 판로를 지원하는 것이 법안의 골자다. 그는 “심각한 양극화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 하고 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안보가 보수의 책임이듯 내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것 또한 제대로 된 보수의 책임”이란 논리로 법안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황준성 교수는 “법안 내용에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개념이 녹아들어가 있다”고 했다.



독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들뿐이 아니다. 2014년 남경필 지사로부터 한·독 의원 친선협회 회장 바통을 넘겨받은 새누리당 강석호 의원도 그들 중 한 명이다. 66년 설립된 한·독 의원친선협회는 최초의 의원외교 모임이다. 기업인 출신인 강 의원은 86년부터 독일 기업과 기술이전·합작사업을 진행하면서 독일과 인연을 맺었다. 코레일 사장 출신 새누리당 최연혜 의원은 독일 유학파다. 독일 만하임대 경영학 박사인 그는 자신의 유학 경험을 담아 『벤츠 베토벤 분데스리가』를 펴냈다. 한국의 독일 동문 네트워크인 아데코(ADeKo)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법관 시절 독일 마르부르크대에 유학을 갔다. 황우여 전 의원, 손지열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유학 동기다.



더민주에선 5선의 원혜영 의원이 김종인 대표 못지않은 열성 독일파로 꼽힌다. 그는 2013년 ‘혁신과 정의의 나라 포럼’을 만들고 다른 야당 의원들과 함께 독일을 공부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던 김두관 의원도 지독파다. 2013~2014년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연수했고, 그의 형은 파독 광부 출신이기도 하다.



강석호·원혜영·김두관도 열성 독일파이들은 “독일 모델을 구체화하는 법안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원혜영), “독일처럼 청년세대를 정치로 끌어들이고 국민의 정치참여를 늘리는 방향으로 정당법과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만들 계획”(김두관)이라며 투지를 불태운다. 이 밖에도 4·13 총선에서 낙선한 19대 의원 5~6명이 독일 연수를 검토 중이다.



왜 이 시점에 한국 정치는 독일에 열광하게 된 걸까. 전문가들은 20대 국회의 정치적 환경에 주목하고 있다. 4·13 총선 결과 신3당 체제가 정립되고, 국회 선진화법의 영향으로 1·2당 중 어느 한 당이라도 비토하면 법안 통과가 어려워진 환경 때문에 독일식 시스템이 다시 주목받게 됐다는 것이다.



독일 모델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치적으론 연정, 경제적으론 사회적 시장경제’다. 김학성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한 정당이 단독 과반을 차지하기 어려운 선거제도를 운영하기 때문에 연정이 불가피한 구조”라며 “독일 정치에서 1당이 3당과 손잡은 소연정뿐만 아니라 1당과 2당이 합치는 대연정도 있었다. 독일 정치에선 대화·타협이 기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어도 후속 정부가 이전 정부의 정책을 승계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 정치가 안정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정부의 개입을 통한 소득 재분배, 인간적 노사관계, 중소기업 토대 유지 등을 목표로 한다. 황준성 교수는 “모든 부문에서의 국가 개입을 찬성하는 건 아니며 영·미 케인스 경제학의 처방처럼 정부가 실업률과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단기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했다. 협치가 화두로 떠오른 정치환경과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양극화·경제불황의 경제 현실 때문에 정치인들이 독일 모델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됐다는 설명이다.



협치와 관련, 김종인 대표는 “내년 대선은 협치 등 독일 모델을 브랜드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한 구조가 될 것”이라며 “내년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과반 정당이 없는 20대 국회에선 독일 연정을 참조한 협치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황식 전 총리도 “(한국 정치의 문제로 거론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뜯어고치려면 독일 모델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며 “독일의 권력 분산과 대화·타협·절충의 정책결정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김학성 교수는 “북한 핵 문제 등으로 남북 간 통일 논의가 위축되면서 독일 연구를 통해 돌파구와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는 사회 분위기도 독일 열풍의 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독일 만하임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김성국 이화여대 경영대학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당선되자 정치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독일 열공 붐이 일었지만 이후 경제민주화 공약이 사실상 퇴보하면서 바람도 수그러들었다”며 “법과 제도만 달랑 가져다 쓰려하지 말고 독일 모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을 우리 실정에 맞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철재·추인영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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