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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마흔에 실명 ‘현대 언론의 아버지’ 퓰리처

중앙일보 2016.06.11 00:06 종합 19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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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
제임스 맥그래스

모리스 지음, 추선영 옮김
시공사, 968쪽, 4만원

퓰리처상 제정자로 세상이 기억하는 조지프 퓰리처(1847~1911)는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다. ‘현대 언론의 아버지’다. 저명 전기작가 제임스 맥그래스 모리스(국제전기작가협회 공동 창립자)가 968페이지로 요약한 퓰리처의 인생을 다시 요약·재구성한다면 이렇다.

퓰리처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인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64년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 동전 한 닢 없었다. 독일어·헝가리어·체코어가 유창했지만 영어는 까막눈이었다. 첫 직장은 군대였다. ‘독일 용병’으로 구성된 북군의 기마부대에 나이까지 속이고 입대했다. 20살에 들어간 두 번째 직장은 신문사였다. 독일 출신 이민자를 대상으로 독일어 신문을 만드는 신문사였다. 두각을 나타냈다. 이내 언론 경영인이 됐다.

성공 비결은 물론 노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영어를 배웠고. 1868년에는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기자들보다 먼저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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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퓰리처의 삶은 극과 극을 오갔다. 1887년 실명한 그가 시력을 잃기 전 찍은 사진. [사진 시공사]

퓰리처는 ‘제3의 눈 효과(the third-eye effect)’의 수혜자다. A·B에게 안 보이는 게 C에게는 잘 보인다. ‘제3의 눈’은 아웃사이더의 눈이다. 헝가리 유대인 출신인 퓰리처에게 ‘제3의 눈’은 그를 기사·사업·정치 감각을 모두 갖춘 보기 힘든 인물로 단련했다.

대중의 관심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았다. ‘대중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녁 식탁에서 화제가 될 스캔들·범죄·감동 스토리로 승부했다. 하루에 최소 한 건의 기사는 너무나 흥미롭고, 특이하고, 도발적이어야 한다고 기자들을 닦달했다.

기사는 쉬운 명사, 생생한 동사로 써야 한다고 기자들을 재교육시켰다. 그 자신 ‘송곳 질문’의 달인이었던 퓰리처는 기자들이 인터뷰 대상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스토리를 끄집어 내오도록 훈련시켰다.

퓰리처는 ‘명품 언론’과 ‘황색 언론’을 동시에 추구했다. 그에게 좋은 기사는 자극적인 기사, 대중영합적인 기사, 정확한 기사, 공정한 기사였다.

사업수완으로 보면 ‘마이다스의 손’이었다. 36세에 망해가는 뉴욕월드를 인수했다. 이민자와 여성을 신규 독자층으로 끌어들이며 미국 최대신문으로 만들었다.

정치인으로서는 주의회 의원,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당시 미국 언론은 ‘권언밀착(權言密着)’ 시대였다. 그는 킹메이커였다. 퓰리처는 신문으로 입맛에 맞는 정치인과 밥맛인 정치인을 걸러냈다.

“사람 이야기가 제일 재미 있다”고 고백하는 전기·자서전 매니어 독자는 『퓰리처』를 읽고 실망하기 힘들 것이다. 퓰리처의 삶은 다채롭고 생생했다.

김환영 기자 kim.whanyung@joongang.co.kr
 
|‘언론인의 노벨상’ 퓰리처상 제정자…명성·악명 두 얼굴

퓰리처는 양면성이 두드러진 괴팍한 인물이었다. ‘명성’과 ‘악명’이 동시에 따라붙는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만. 퓰리처는 민주주의와 진보와 언론의 자유의 힘을 신봉했다. 흔들림이 없었다. 조직 장악력이 좋았다. 기자들에게 “나를 돕겠소?”라고 묻고 “네”라는 답이 돌아오면, “좋아요, 나는 당신이 맘에 들어요. 그럼 일하러 가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기자들에게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싸울 때는 가혹하고 잔혹했다. 집에서 별로 좋은 아버지·남편은 아니었다. 자식들과 부인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평생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던 퓰리처는 1887년 40세 나이에 실명했다. 그 후 20년간 해외 여행을 다녔다. 여행 중에도 뉴욕월드의 경영과 편집에 간여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원격조정 했다.

그가 남긴 뉴욕월드는 1967년 폐간됐다. 그의 기부로 생겨난 컬럼비아대 언론대학원과 퓰리처상은 남았다. 퓰리처상은 “언론인들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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