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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열·공·틈·놀

중앙일보 2016.06.11 00:01 종합 2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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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열공틈놀!(열심히 공부하고 틈틈이 놀자) 요즘 내 생활지침이다. 박사 과정 3학기 차인 이번 학기도 6월 19일 일요일 자정, 마지막 과제를 제출하면 끝난다.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마무리해야 할 수업 논문이 세 편이나 되니 그 스트레스가 말도 못한다. 지금 한창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을 전국의 고3들도 이런 상태겠지. 우리 모두 파이팅! 그래도 나는 일주일 후면 해방이다. 아니 반쯤 죽었다가 살아날 거니까 부활하는 건가?

학기 말이면 늘 시간에 쫓기지만 이번에는 5월 말까지 발표자나 연설자로 참석해야 하는 국내외 행사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6월이 되자마자 굳게 결심했다. 앞으로 3주간은 오로지 학업에만 집중하자고. 그리하여 특강을 포함한 외부활동 금지, 산과 들로 다니는 야외활동 금지, 영화·공연 관람 등 문화생활 금지, 지인들과의 식사나 경조사 참석 등 사회생활을 금지하기로 했다. 무슨 욕을 먹더라도 이걸 지켜야 학기를 끝낼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10/10 체제에 들어갔다. 주말을 포함해 매일 학교 책상에 아침 10시에 앉아 밤 10시에 일어나겠다는 결심이다. 그 12시간은 세 시간 공부와 30분 휴식을 반복하고 휴식시간 외에는 e메일 확인, 문자, 카톡, 전화 통화 등도 전면 금지하기로 했다. 시간 확보보다 그 시간에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관건일 테니 말이다.

그 금지 목록 중 제일 어려운 건 등산 금지다. 무려 3주일이나 산에 못 가는 건 고문 중에 고문. 참말이지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산에 안 가고는 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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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못 가서 죽으면 안 되니까 대신 휴식시간을 모아 교정 산책을 한다. 2012년 이화여대에서 가르치면서 시작했으니 벌써 5년째다. 이 덕분에 이제는 계절마다 교정 어디에 무슨 꽃이 피는지, 어느 나무가 어떤 모양의 잎을 틔우고 무슨 열매를 맺는지 훤하다. 서울에서 제일 먼저 핀다는 본관 앞 목련, 중강당 앞 석류꽃과 쪽동백, 역사관 주위의 불두화와 조팝나무, 헬렌관 앞에 숨은 듯 피는 작약과 모란…. 어디에서 라일락과 아카시아 향기가 쏟아지는지, 어디에서 은행의 구린 냄새가 풍기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매일 산책하며 보고 느낀 경험을 종합해 고색창연한 석조 건물과 아담한 한옥 건물을 지나면서 꽃, 나무도 많이 볼 수 있는 산책로를 개발하게 됐다. 이름하여 ‘비야올레길’! 30분 코스, 한 시간 코스, 안산의 자락길까지 연결한 세 시간 코스가 있다.

계절에 따라, 시간과 그날의 기분에 따라 산책 코스도 조금씩 바뀌는데 초봄부터 늦여름까지 꽃이 많은 계절은 주로 꽃길을 걷는다. 오늘 현재 이화여대 교정의 주인공은 금계국, 늦은 영산홍, 황금낮달맞이, 개망초, 산딸나무다. 이제 보라색 비비추와 무궁화, 노란 나리와 선홍색 꽃무릇 등이 차례로 피겠지.

바로 어제 일이다. 도서관에서 마주친 학생과 비야올레길을 걸어 내려오게 됐다. 일부러 꽃 많은 길을 택했다. 이 친구, 사방에 핀 꽃을 보며 연신 감탄하더니 금계국을 보고는 “와, 코스모스가 벌써 피었어요”라고 한다.

흐흐흐, 나도 몇 년 전까지 저 수준이었지.

“이건 금계국이야. 꽃잎만 보면 헷갈리겠지만 잘 봐. 코스모스랑은 잎 모양이 완전히 다르지?”

조금 더 가서 이 친구, 버찌를 보고는 “이 붉은 구슬 같은 열매는 뭐예요?” 한다.

“이 나무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생각해봐. 수업 가느라 이 길을 맨날 지났을 거 아니야?”

“뭐더라? 벚꽃이었나?”

“맞아. 이건 벚나무고 그러니 이 열매는 버찌인 거지.”

“와, 교수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에이그. 내가 많이 아는 게 아니라 네가 하나도 모르는 거지. 나 역시 얼마 전까지 버찌가 이토록 예쁜지 미처 몰랐다. 화려한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콩알만 한 초록색 열매가 열리고 그것이 점점 투명하게 붉어지면서 짙은 신록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그뿐인가. 가을이면 무성한 잎들 한 잎 한 잎이 꽃만큼 예쁜 붉은 빛으로 물들고, 한겨울 그 까만 가지에 눈이 쌓이면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특히 중강당 앞 왕벚꽃나무는 주위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과 멋지게 어우러져 진작에 ‘미스 이대’로 임명해 두었다.

요즘에는 모르는 꽃과 나무를 찍어 올리면 초고속으로 이름을 알려주는 앱이 생겨 우리 학생 같은 ‘꽃맹’에서 벗어나기가 훨씬 쉬워졌다. 같은 꽃나무라도 제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욱 사랑스럽고 더 눈길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도 매일 서너 가지씩은 새로 배우거나 이름을 재확인한다. 졸업할 때까지 비야올레길에 있는 꽃나무의 이름 모두를 정확히 알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박사학위 받을 때 스스로에게 비공식 꽃, 나무 박사 학위를 수여할 계획이다. 와우, 생각만 해도 신난다.

그나저나 이제 겨우 세 학기가 끝나가니 박사 논문 통과까지는 도대체 얼마나 더 남은 거지? 아, 이 생각은 당분간 하지 말자.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니까!

한 비 야
국제구호전문가
세계시민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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