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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에 새 한마리가 …” 26세 신부 얻은 린보취

중앙선데이 2016.06.05 00:30 482호 28면 지면보기

1 스탈린 사망 후 마오쩌둥(오른쪽 셋째), 주더(왼쪽 첫째)와 함께 추도회를 주재하는 린보취(맨 오른쪽). 1953년 3월 9일, 베이징.



60회 생일날, 린보취(林伯渠·임백거)는 주밍(朱明·주명)의 예물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80-

며칠 후, 26세 신부와 60세 신랑의 결혼식이 열렸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소감을 물었다. 린보취는 자작시 한편으로 대신했다. 마지막 구절에 다들 환호했다. “봄바람 타고, 새 한 마리가 품 안으로 들어왔다.”



당시 린보취의 공식 직함은 중공 관할지역인 산간닝변구(陝甘寧邊區·중공 서북국 소재지인 산시성(陝西省) 북부와 간쑤성(甘肅省), 닝샤성(寧夏省) 일부. 중일전쟁시절인 1937년부터 국민정부 직할 행정구역. 국·공전쟁이 시작되자 장제스가 반란구역으로 선포) 주석이었다.



당 중앙은 주밍의 일자리 마련에 분주했다.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한마디 거들었다. “주밍은 재능과 능력을 겸비했다. 선전 공작이 적합하다.” 지하 공작자가 아니면 부부는 떨어져 살 때였다. 신혼 생활을 마친 린보취와 주밍은 각자 갈 곳으로 떠났다.



47년 봄, 후쭝난(胡宗南·호종남)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25만명이 산간닝변구의 중심지 옌안을 맹공했다. 중공은 서북 야전군을 조직해 대응했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를 사령관 겸 정치위원,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을 부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3만에 불과한 서북 야전군은 연전 연승했다.



변구 주석 린보취는 치질이 심했다. 야전군 지휘는커녕, 피와 분비물이 눌어붙은 침상에서 온몸을 뒤척거렸다. 보다못한 시중쉰이 “주밍을 보내달라”고 중앙에 제의했다. 서북에 온 주밍은 린보취의 엉덩이와 씨름을 했다. 효과가 있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강청)은 남편 병구완으로 수척해진 주밍을 볼 때마다 눈살 찡그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주밍은 주밍대로 장칭을 무시했다. 경이원지(敬而遠之)했다.



주밍은 남편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20년대 초, 각지에 공산주의 조직이 출범할 때, 후난(湖南)에는 마오쩌둥이 있었고, 상하이에는 린보취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성립된 후, 공산당원 신분으로 국공합작에 참여해 요직을 맡은 사람은 린보취와 마오쩌둥 뿐이었다. 국민당 2차 대회에서 린보취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될 때 마오쩌둥은 후보 중앙위원이었다.”



신 중국 성립 후 린보취는 중앙 비서장에 취임했다. 당 주석과 부주석,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연결하는 중추신경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주밍은 늙은 남편을 극진히 챙기고, 아랫사람들도 잘 보살폈다. 53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남방출신 마오쩌둥은 추위를 잘 탔다. 장칭과 함께 항저우(杭州)에서 겨울을 보냈다. 마오가 베이징으로 돌아간 후에도 장칭은 항저우를 떠나지 않았다. 이듬해 3월 하순, 장칭은 익명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지가 상하이였다. 30년대, 상하이 시절 장칭의 사생활과 국민당 정보기관에 체포됐다 풀려난 일들이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장칭은 자신의 과거와 당 상층부의 일을 상세히 아는 당 고위 간부나 문화계 인물, 혹은 그 부인 중에 한 명이라고 단정했다. 상하이시 공안국에 조사를 의뢰했다.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베이징으로 달려온 장칭은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내보였다. 꼼꼼히 읽어본 마오의 반응은 의외였다. “모두 사실이다. 역사는 바꿀 수 없다.” 장칭은 울화가 치밀었다. 마오에게 대들다시피 말했다. “이건 나를 겨냥한 게 아니다. 결국은 주석을 흠집내기 위한 거다.” 마오의 귀가 쫑긋했다. 장칭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안부장을 호출했다. 편지를 건네며 작성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장칭도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상하이의 지하 공작자 출신과 문화 예술가들을 이 잡듯 뒤지면 된다.”



상하이에 내려온 공안부장은 회의를 소집했다. “상하이 쪽은 시 공안국에서 책임져라. 나는 저장성(浙江省)을 책임지겠다. 800여명의 필적을 수집해 감정에 착수했다. 결과는 오리무중, 발신자 확인은 수포로 돌아갔다. 장칭은 이 기회에 평소 눈에 가시였던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영문도 모른 채 공안기관에 끌려가는 간부들이 줄을 이었다. 장칭의 상하이 시절 동료들도 된서리를 맞았다.

2 산간닝변구 주석 시절,?중공 서북군 간부들과 함께한 린보취(앞줄 오른쪽 네 번째). 앞줄 오른쪽 첫째가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이다. 48년 봄, 산베이. [사진 제공 김명호]



61년 5월, 린보취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주밍은 남편의 수장품을 혁명 박물관에 기증하고 베이징을 떠났다. 항저우에 터를 잡고 린보취의 시와 서간·유고를 정리했다. 완성될 즈음 당 중앙에 편지를 보냈다. “동의하면 남편의 문집을 출간하고 싶다. 비용은 자비로 해결하겠다.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회신이 올 때까지, 주밍은 영화와 춤·쇼핑으로 소일했다.



하루는 저장성 공안청장이 주밍을 방문했다. 편지 두 통을 내놓고 확인을 요청했다. 필체가 똑같았다. 주밍은 7년 전 장칭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인정했다. 그날 밤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혁 시절, 4인방은 주밍을 반혁명 분자로 몰았다. 린보취에 관해서도 온갖 흉측한 소문을 퍼뜨렸다. 4인방 몰락 후 중공은 주밍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장칭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모두가 사실이다. 반혁명 분자로 몬 것은 모함이다.” 린보취의 문집과 평전도 그제서야 햇빛을 봤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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