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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심슨 가족’ ‘더 오피스’ 수석 작가 대니얼 전의 글쓰기 10계명

중앙일보 2016.06.05 00:05
미국 사회를 가장 위트 있게 풍자한 만화로 손꼽히는 ‘심슨 가족’(1989~, FOX)과 어느 제지 회사 사무실의 부조리한 일상사를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태로 담은 미국 드라마 ‘더 오피스’(2005~2013, NBC). 이 두 시리즈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는 건 단연 우수한 작가진이다. 그 ‘브레인’ 격이라 할 만한 수석 작가 가운데 한국인이 있다. 바로 지난해 미국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에서 선정한 ‘주목해야 할 TV 작가 10인’에 뽑힌 한인 교포 2세 작가 대니얼 전(36)이다.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시리즈들의 탄탄한 스토리를 도맡아 온 그만의 비결은 뭘까. 최근 열린 ‘서울디지털포럼’(SDF, SBS 주최)에 코미디와 소통에 관한 연사로 초청받은 그를 5월 20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만났다. 강연과 인터뷰에서 그가 족집게 과외하듯 들려준 글쓰기 비법을 10계명으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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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희찬(STUDIO 706)]

1 글쓰기는 공예다 공예는 예술과 달라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과정 역시 중요합니다. 목수가 목공을 익히듯 부지런히 훈련해야 해요. 아마추어 작가는 영감이 오길 기다리지만 직업 작가에게 그건 사치죠. 내일이 마감이라면 당장 영감을 캐내야 해요. 전 운전할 때 아이디어가 잘 떠올라요. 글이 막히면 드라이브를 하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 규칙을 만드세요. 최고의 작가와 예술가들의 업적 뒤엔 그들만의 규칙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죠. 매일 쓰는 게 습관이 되면 점점 더 많은 걸 쓸 수 있게 됩니다.

[인터뷰] 날카롭고 위트 있는 글로 미국을 사로잡은 남자


2 구조가 먼저다 범죄 수사 시리즈에는 매회 반복된 패턴이 있지만, 시청자는 오히려 매력으로 받아들여요. 전개 방식은 익숙해도 어떤 소재로 어떻게 채워질지 궁금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나온 3막극 구조는 여전히 잘 먹혀요. 주인공을 나무 위에 올려서(1막), 돌을 던지고(2막), 나무에서 끌어내리는(3막) 형식이죠. 젊은 작가들은 이런 형식이 고리타분하다며 아방가르드한 형식을 추구해요.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3막극만 한 게 없습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면 구조를 먼저 탄탄하게 짜세요. 창의력은 나머지 부분에서 발휘하면 됩니다.

3 ‘그러나’와 ‘그러므로’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풍자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 시리즈(1997~, Comedy Central)의 크리에이터가 가르쳐 준 거예요. 미국에선 대본 쓰는 걸 ‘스토리 깨기(Story Break)’라 해요. 스토리 깨기에서 중요한 건 모든 이야기가 ‘그러나’ 혹은 ‘그러므로’로 연결돼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편’으로 연결되는 것과 달라요. 장면 간 인과관계가 없는 연결은 나열에 불과하죠.

4 제약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만약 세상의 물리적인 규칙을 모두 무시하는 이야기를 쓴다고 쳐요. 모든 게 가능한 세상에서 대체 뭐가 놀랍겠어요. 코미디도 절제된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와야 폭소를 일으키죠.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 HBO)처럼요. 의표를 찌르고 싶다면 규칙과 제약이 많은 사회에 대해 쓰는 게 유리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그 세계를 즐길 준비가 되니까요.

5 아이디어에 왜 반했는지를 잊지 말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려도 힘들게 쓰다 보면 디테일에 매몰될 수 있어요. 처음 쓰게 된 계기를 잊지 말아야 해요. 가령 ‘스타워즈’ 시리즈(1977~)의 묘미는 광선 검을 휘두르는 액션신이죠. 그걸 기대하고 봤는데 한 시간 넘게 은하 공화국 의회 장면만 지루하게 이어진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겠어요. 왜 자신이 그 아이디어에 반했는지 반드시 기억해야 해요.

6 사건의 동기를 납득시켜라 사건의 결과보다 동기를 납득시키는 게 더 중요해요. ‘더 오피스’에서 누군가 승진한다면 시청자는 승진 그 자체엔 관심이 없어요. 그가 왜 승진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싶어 하죠. 동기 부여는 스토리에도 추진력을 줘요. 가장 재미있는 상황은 캐릭터들이 저마다 명백한 의도를 감춘 채 서로가 모르게 그걸 충족시키려고 할 때 벌어지죠. 욕망이 상충하면서 생겨난 오해와 갈등이 극을 한층 흥미롭게 만들어요.

7 정서를 기반으로 써라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가 말하길 자신이 출연한 ‘워킹 데드’ 시리즈(2010~, AMC)가 인기 있는 건 좀비 때문이 아니라더군요.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 인간의 본성과 생존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공감을 얻었다는 거예요. 맞는 말이죠. 지구에 남은 마지막 인류를 다룬 고차원적인 작품이어도, 형제 간의 다툼이나 사랑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죠.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재미는 금세 고갈되고 말 테니까요.

8 캐릭터를 사랑하라 ‘더 오피스’ ‘심슨 가족’이 장수한 가장 큰 비결은 캐릭터에 대한 작가들의 애정이 식지 않은 덕분이에요. ‘심슨 가족’의 한 에피소드에서 호머 심슨이 바보가 된 이유가 밝혀져요. 어릴 적 콧구멍에 넣은 크레용이 뇌에 박혔기 때문이죠. 크레용을 제거하고 똑똑해진 호머는 사람들이 자기를 불편해 하자, 다시 바보가 되기 위해 크레용을 집어넣어요. 잠시나마 대화가 통했던 똑똑한 둘째 딸 리사와의 지적인 대화를 포기한 채 말이죠. 단지 웃기려고 쓴 에피소드가 아니었어요. 호머와 리사를 생각하면 얼마나 ‘웃픈’지. 캐릭터를 속속들이 사랑하면 아이디어가 샘솟아요. 작가가 등장인물에게 소홀해지면 작품에서 대번에 티가 나죠.

9 클리셰를 피하라 제가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죠. 코미디의 중요한 속성은 놀라움인데, 클리셰는 식상하잖아요. 자부심 있는 작가라면 닳고 닳은 조크의 유통업자로 전락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할 거예요. 코미디에만 해당하는 얘긴 아니겠죠.

10 ‘내 이야기’로 만들어라 미국 방송가 속설 중 하나예요. 방송사 임원들에게 새로운 쇼를 프레젠테이션할 때 작가가 “사실 제 얘깁니다”라고 하면 제작 가능성이 확 높아진다는 거죠. 미국 방송가의 추세이기도 해요. 한국·중국·남미 등 이전까지 주류 사회에서 소외돼 있던 문화권의 특색이 고스란히 반영된 예능 콘텐트가 신선한 호응을 얻고 있거든요. 과거와 달리 주류의 잣대에 맞게 변형시키거나 하지 않고 고유한 원형 그대로 말이죠. 작가 스스로를 위해서도 ‘내 이야기’라는 마음이 중요해요. 가혹하고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작품 제작 과정을 버텨 내려면, 나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란 확신은 꼭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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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F에서 강연 중인 대니얼 전. [사진 라희찬(STUDIO 706)]

진실하고 색다른 삶을 그릴 때 좋은 코미디가 만들어진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인류학을 전공하고 코미디 작가가 됐다.
“영문학을 전공하다 코미디 작가로 진로를 정하고 전공을 바꿨다. 사회나 사람에 대해 글을 쓰려면 경험은 다양한 편이 좋으니까. 영화나 문학을 전공하면 오히려 제약이 될 것 같았다.”

-코미디 작가를 꿈꾼 계기는. “내 고향은 아시아인이 거의 살지 않는 미국 소도시였다.
늘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게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다는 걸 말이다. 코미디는 아웃사이더였던 내가 미국 주류 사회에 섞일 수 있는 방식이었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꿈을 키운 건 하버드대 교내 코미디 잡지 ‘하버드 램푼’에 글을 기고하면서다. 코난 오브라이언 등 ‘하버드 램푼’이 배출한 쟁쟁한 선배들을 지켜보며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삶을 열심히 관찰해 남들이 놓친 지점을 색다르고 진실하게 표현할 때 좋은 코미디가 된다. 요즘 내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건 내 아이다. 아이가 아직 어린데, 하루는 이렇게 묻더라. ‘아빠, 나 결혼하면 불도저 몰아도 돼요?’라고. 결혼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관문이라 생각한 거다(웃음). 그런 사고방식에서 신선한 자극을 얻는다.”

-코미디 작가로서 어려움이 있다면.
“사람들이 부쩍 쉽게 분노하는 것 같다. 희극인에겐 힘든 상황이다. 기분 나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에겐 조금만 과한 농담을 해도 사회에서 완전히 배척당할 만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최근 한국엔 잇따른 대형 인재(人災)로 웃음을 잃은 사람이 많다. 미국에서 9·11 테러 사건 같은 비극이 있었을 때 코미디 작가들은 어떤 고민을 했나.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1975~, NBC) 등 적잖은 코미디 쇼가 휴방했다. ‘어니언’이라는 풍자 뉴스 매체도 처음엔 발행을 못했다. 그러다가 9·11 테러 사건 이후 첫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망했다(Holly Shit)!’라 써서 내보냈다. 많은 사람이 그걸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코미디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 어떤 비극에 대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그 비극이 절대 극복 못할 일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차기작은.
“파라마운트와 영화를 준비 중이다. 한국 코미디는 자주 접하지 못했지만 한국영화는 즐겨본다. 통찰력이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이창동 감독의 ‘시’(2010)를 좋아한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은 ‘창의력 폭발’수준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언젠가 한국과 협업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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