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독] 23년 전 이건희 신경영 불 지핀 후쿠다, 이재용에도 조언

중앙일보 2016.06.03 02:30 경제 2면 지면보기
기사 이미지

후쿠다(左), 이재용(右)

후쿠다 다미오 전 삼성전자 고문과 삼성가(家)와의 인연이 대(代)를 이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건희 회장 ‘질 경영’ 선언에 영향
퇴사 후에도 삼성가와 인연 이어가
디자인, 부가가치 높이는 문화행위
“후쿠다 보고서 지금도 유효” 평가

삼성그룹 관계자는 2일 “이 회장이 (입원 전에) 업무상 또는 요양차 일본을 방문할 때 자주 후쿠다 전 고문을 만났다”며 “이 회장이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후쿠다 고문을 소개하면서 2대째 교유(交遊)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은 후쿠다 전 고문을 만나 디자인을 포함한 경영 전반에 대한 환담을 나누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삼성에서 퇴사한지 17년이 지났지만 후쿠다 전 고문의 경영 조언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후쿠다 전 고문은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고 한 ‘신경영 선언’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서 삼성 제품의 디자인 실태를 낱낱이 분석한 ‘후쿠다 보고서’를 읽은 뒤 삼성전자 임원 200여 명을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했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양(量)이 아닌 질(質) 위주로 간다”고 선언했다.

후쿠다 전 고문은 삼성전자에 합류하기 전에 일본전기디자인센터 디자인실, 전자기기업체 교세라의 중앙연구소 디자인실 등에서 14년간 근무한데다 삼성 퇴사 뒤에는 오사카 중소기업투자육성 기술평가위원을 6년 가까이 역임해 디자인은 물론 경영 전반에 밝다.

후쿠다 전 고문은 1989년 5월부터 1999년 9월까지 삼성전자에서 근무한 뒤 곧바로 교토공예섬유대학원으로 옮겨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다 최근 교수직에서 은퇴했다.
기사 이미지
중앙일보는 ‘후쿠다 보고서’의 핵심인 ‘經營과 Design’ 파트를 단독 입수했다. A4용지 14장 분량의 ‘經營과 Design’은 서문을 비롯해 ‘디자인이란’, ‘디자인 부문의 매니지먼트’, ‘일상적 문제? 작지만 큰 문제’, ‘현재의 문제’ 등 9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다.

각각의 챕터는 큰 표의 형태로 구성돼 있는데 왼쪽엔 삼성 경영진들이 디자인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 삼성 디자인의 문제점이 정리돼 있고, 우측 칸에는 이에 대해 후쿠다 고문이 내놓는 답변과 설명이 기재돼 있다.

보고서에는 1990년대 초반 당시 삼성 임원들이 디자인 분야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적나라하게 들어있다. ‘디자인이란’ 챕터에서 삼성 임원들은 “디자인은 형(形)과 색(色)을 창조하는 행위 아닌가”, “좋은 디자인의 기준은 도대체 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후쿠다 고문은 “삼성 구성원들이 디자인하면 패션 디자인만 떠올릴 뿐 공업디자인과 상품디자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조차 없다”며 “디자인은 형과 색을 창조하는 일이 아니라 제품의 편리성 연구부터 시작해 부가가치를 높여 이용자의 생활을 창조하는 문화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디자인과 경영’ 챕터에서는 삼성 임원들이 “디자인의 부가가치를 모르겠다. 디자인 공헌도를 계량화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후쿠다 고문은 “디자인 결정은 개인적 기호가 아니라 각종 정보를 바탕으로한 고도의 경영적 판단의 영역”이라고 답한다. 이어 “숫자로 나온 결과물들만 상대하면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며 “타사의 좋은 숫자(실적)가 나온 배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상적 문제-작지만 큰 문제 3’ 챕터에는 당시 삼성이 디자인 결정 과정에서 갖고 있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경영자측은 “A안, B안, C안을 절충하면 좋은 디자인이 되지 않나”라는 질문을 내놓는다. 후쿠다 고문은 “각각의 디자인은 컨셉트가 다른 제품”이라며 “판단이 어려울때, 적당히 믹스하라고 지시하지만 절충안은 포인트가 없어 좋은 디자인이 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디자인 직군의 관리에 대해선 “디자이너는 자질과 감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holonic’하게 운영하되 제품의 성격에 따라 구성하라”고 충고했다. ‘holonic’은 개성이 강한 개인이나 소집단을 조직 전체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경영 방식을 말한다.

그간 후쿠다 보고서의 존재는 알려졌으나 상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아 국내외 기업들이나 경영학계에선 관심을 보여왔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뽀로로’를 창작한 (주)오콘의 김일호 대표는 “디자인과 경영에 관한한 선구자적 혜안이 담긴 보고서”라며 “‘holonic 매니지먼트’ 등은 지금 기업들에게 들려줘도 유효한 얘기”라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