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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만에 빛 본 청동정병…“기적처럼 보존”

중앙일보 2016.06.03 01:08 종합 22면 지면보기
“기적과 같은 일이다.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형태가 완벽하게 남아 있다니….”

흥전리 절터서 국보급 2점 발굴
높이 35㎝ 몸체에 흠집 하나 없어
통일신라~고려 양식 변천 보여줘
승려들 물병·공양도구로 사용

동국대 최응천(미술사학과) 교수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의 앞에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청동정병(淨甁)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방금 땅에서 나온 듯 몸체에는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그 흙 사이로 검정색에 가까운 감청색 정병의 균형 잡힌 자태가 빛났다. 1000여 년의 세월을 뚫고 나온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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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굴된 청동정병 2점. 통일신라의 뛰어난 불교미술을 보여준다. [사진 문화재청]

2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에 있는 절터인 흥전리사지에서 통일신라 시대 청동정병 두 개가 처음 공개됐다. 몸체에 상처 하나,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형태였다. 그간 발굴된 통일신라 정병 가운데 가장 온전한 모양을 갖췄다. 특히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양식 변천사를 보여줘 한국 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흥전리 사찰(정확한 명칭은 미상)은 고려 초인 11세기께 폐사(廢寺)한 것으로 알려진다.

인도에서 처음 사용된 정병은 중국을 거쳐 신라로 전해졌다. 정병은 승려들이 마실 깨끗한 물을 담았던 휴대품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향로·촛대 등과 함께 불단(佛壇)에 올리는 공양구로 사용됐다. 고대부터 불교의식·미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청동정병은 불교가 융성했던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주로 제작됐다.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는 경북 군위 인각사, 충남 부여 부소산에서 세 점(8세기 후반)이 나왔으나 형태가 일부 훼손돼 아쉬움이 컸다. 각각 높이가 약 35㎝에 이르는 흥전리사지 정병은 시기는 비록 조금 늦지만 출토지와 제작시기가 분명하고, 모양도 원형 그대로 남아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절터 동쪽 건물 구들 위에서 출토됐으며, 함께 나온 큰항아리(大壺)가 9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져 정병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최 교수는 이번 발굴이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한국 청동정병의 기원에 해당하는 ‘국보급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인각사 정병의 경우 상부의 뾰족한 부분인 첨대(尖臺)와 그 아래 몸체가 중국 당나라 양식을 충실히 따른 반면, 흥전리사지 정병부터 첨대가 짧아지고 몸체 또한 동그래지면서 신라의 고유한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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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92호 고려시대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사진 문화재청]

청동정병은 고려시대에 보다 정교해졌다. 청동 몸체에 실처럼 가는 은(銀) 무늬를 집어넣은 고려의 독특한 기법인 은입사(銀入絲)가 도입됐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92호 ‘청동 은입사포류수금문 정병’(높이 37.5㎝)이 대표적이다. 정병 재료도 청동에서 도자기로 확대됐고, 상감(象嵌)기법도 활발하게 적용됐다. 흥전리사지 정병에는 아무런 무늬도 새겨지지 않았다.

이번 정병은 통일신라 불교의 전파 루트도 보여준다. 남쪽 경주에서 시작된 불교문화가 태백산맥을 타고 당시 주요 선종(禪宗) 사찰이었던 설악산 진전사지까지 이른 것으로 풀이된다.

발굴작업을 맡고 있는 불교문화재연구소 박찬문 팀장은 “흥전리사지 일대는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이 갈라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며 “발굴지역에서 신라시대 승단의 최고 통솔자인 ‘국통(國統)’이 새겨진 비석 조각이 출토된 만큼 당시 위세가 높았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삼척=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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