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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내 말 좀…” 이세돌 고향 비금도에 법정이 열렸다

중앙일보 2016.06.01 02:10 종합 12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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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열린 ‘섬소리 재판’에서 김평호 판사(맨 뒤)가 변론을 듣고 있다. [사진 정혁준 기자]


31일 오전 전남 목포시에서 한 시간가량 쾌속선을 타고 간 신안군 비금도. 알파고와의 바둑 대결을 벌인 이세돌(33) 9단의 고향인 이 섬의 면사무소에 4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있었다. 비금도 역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재판은 광주지법 목포지원의 김평호(45) 판사가 관장했다. 이 출장 재판의 이름은 ‘섬소리(섬김·소통·이해) 재판’이다. 신안군 섬 주민들이 “배를 타고 목포까지 가기가 쉽지 않고 당일 귀가도 어렵다”며 고충을 호소하자 목포지원이 찾아가는 법정을 실험적으로 도입했다. 섬소리 재판은 장용기(51) 목포지원장이 직원 공모를 통해 얻은 이름이다

이날 총 9건의 재판이 진행됐다. 첫 재판부터 원고와 피고의 신경전이 날카로웠다. 내용은 비금도 토박이 강모(51)씨와 건설업자 김모(62)씨 사이에서 벌어진 신축 공사 분쟁이었다.

지난해 3월 김씨는 “펜션을 만들어달라”는 강씨의 요구에 따라 이동형 펜션을 만들어줬다. 하지만 해당 건물에 대한 착공 신고 없이 건축이 이뤄져 강씨가 과징금 740만원을 물게 됐다. 또 본래 밭으로 등록된 토지 위에 형질변경 없이 지은 건물 두 채를 철거하라는 군청의 명령도 떨어졌다. 강씨는 “김씨가 책임지고 모든 행정 업무를 처리하기로 해놓고 이를 지키지 않았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김씨는 “과징금은 땅 주인이 내야 한다. 형질변경도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것이다”고 맞섰다.

간이 법정에서 두 사람은 변호사들보다 큰 목소리로 다퉜다. 서로에게 삿대질도 했다. 방청객에 앉아 있던 강씨의 부인은 “한말씀만 드리겠다”며 번쩍 손을 들더니 “우리처럼 농사짓고 염전만 하는 사람이 뭘 알겠습니까”라고 하소연했다. 지켜보던 주민들도 편이 갈렸다.

재판관인 김평호 판사가 합의를 유도했지만 30분 넘게 양측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오후의 현장검증에서 판사와 조정위원들이 해당 토지와 건물을 살펴보고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자 김씨가 자신의 주장을 조금 내려놓기 시작했다. 변호사들도 다음 공판까지 해당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신안군과 타협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법원은 이날 조정위원으로 김동우(55) 비금면장과 강정태(52) 흑산면장을 위촉했다. 주민들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신안군수협이 흑산도 주민 4명을 상대로 제기한 800만~2500만원의 대여금 반환 청구 사건도 이 방문 재판에서 다뤄졌다. 이 사건은 원고 승소로 곧바로 판결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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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한쪽에서는 목포지원 등기과장과 민사·형사과장 등이 일일 상담위원으로 나섰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등기나 생활민원에 대해 상담해줬다. 주민 박동석(57)씨는 “10년 전에 산 땅을 등기처리 하지 못해 등기상의 주인과 싸우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개명·나이 정정 등에 대해 물어보는 주민도 있었다.

김 판사는 “주로 낮에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섬 주민을 배려한 ‘야간 법정’이나 컴퓨터를 이용한 ‘화상 조정’ 도입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비금도 주민 명영봉(61)씨는 “육지로 나가지 않고도 재판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해봤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고 말했다.

비금도(신안군)=정혁준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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