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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의 유레카, 유럽] 브렉시트·헌법개정·난민할당제…유럽, 국민투표 열풍

중앙일보 2016.05.30 01:25 종합 18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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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에 반대하는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오른쪽)와 찬성하는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가운데)이 런던시장 보수당 후보 지원 유세에 등장했다. [AP=뉴시스]


“누구도 어디로 갈 지 모른다. 누구도 어느 길로 가야만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건 오로지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란 점이다.”

1950년대 연 3건, 근래 8건 급증
정치 합의 어렵자 국민에 직접 물어
“늘 합리적 결론 내는 건 아니다”
EU 관련 안건은 부결율 높아 우려


지난 24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의 한 정치풍자 프로그램에서 나온 얘기다. 작가이자 한때 보수당 의원을 지낸 자일스 브렌드레스는 다음달 23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여부(Brexit·브렉시트)를 묻는 국민투표를 앞둔 상황을 이 같이 요약했다.

그는 찬반 진영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브렉시트가 되면 집값이 폭락하고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게다. 무시무시한 일이다. 남기로 해도 매주 영국 해안으로 몰려드는 200만 명의 이민자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곤 1992년 영국이 유럽 환율 체제에서 탈퇴할 무렵의 혼란을 떠올렸다.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몰랐고, 일이 벌어지던 중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고, 일이 벌어진 후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며 “(브렉시트 여파를) 아무도 모른다는 걸 나는 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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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혼미 그 자체다. 여론조사마다 들쑥날쑥 한데 전화 여론조사에선 잔류 쪽이 견고한 우위를 보이나 온라인 조사에선 엎치락뒤치락한다. 투표율에 달렸다는 의미다.

싸움은 격해졌다. 집권 보수당은 내분 상태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두곤 “브렉시트가 국가에 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가 브렉시트를 야기할 수도 있는 국민투표를 하자고 한 건 아이러니”란 비판도 나온다.

그는 당 안팎에서 유럽 회의론자들이 급부상하자 이를 달랠 목적으로 2013년 국민투표를 제안했었다. 설령 잔류로 결론 나더라도 격분한 보수당 내 탈퇴론자들이 캐머런 총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가디언의 일요판인 옵저버는 “국민투표는 직접 민주주의의 꽃이지만 분명한 건 어느 쪽의 결과든 깔끔한 답을 주진 않을 것이란 점”이라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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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럽 전체적으론 국민투표가 붐을 이루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국민투표 열풍(referendumania)’이란 조어까지 만들었다. 브렉시트 투표 외에도 지난 4월 네덜란드에서 EU와 우크라이나간 협정에 대한 국민적 의사를 물었다. 이탈리아에서 오는 10월 이전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EU의 난민할당제를 안건으로 올린다고 했다. 통계 상으로도 50년대 유럽 전체적으로 연간 세 건 정도였는데 근래 8건으로 늘었다.

사실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은 국민투표 증가에 찬성한다. 국민의 참여와 토론을 이끌어낸다는 이유에서다. 국민투표가 일상화된 스위스가 민주주의 모범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투표가 늘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는 건 아니다”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나 최근처럼 기성 정치제도와 정치인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크고, 포퓰리스트(인기 영합주의자)와 반EU성향의 민족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말이다. 특히 반EU 감정이 확산되면서 EU 관련 사안의 부결율이 높아진 걸 우려나는 이들이 많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스트래트포는 “유권자들에게 직접 묻는 게 유럽을 개혁할 민주적 방식으로 보이나 실제론 그리 단순하지 않다”며 “EU를 개혁하기보단 오히려 약화시키는 쪽”이라고 진단했다. 현재로선 EU 개혁안이 나오더라도 28개 회원국 국민으로부터 추인 받는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고도로 전문적인 정치·경제적 사안에 대해 유권자에게 ‘예스’ ‘노’로만 묻는 게 타당하냐는 의문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직접민주주의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엔 괜찮지만 대륙은커녕 국가를 운영하는데도 적절치 않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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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국민투표 열풍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이다. 정치 엘리트들이 자체 합의가 어려울 때 국민투표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여서다.

지난해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도 실효(失效)된 EU와의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반대해 달라”고 했다. 프랑스의 국민전선(FN) 등 반EU 정당들이 선거 공약으로 국민투표 상시화를 내걸고 있다. “국민투표는 독재자나 선동가의 수단”이라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주장은 이제 ‘옛말’이 됐다.

고정애 런던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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