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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코쿰스 도크 있던 그곳, 193개국 10만 명 몰리는 창업 심장부 됐다

중앙일보 2016.05.26 02:28 종합 4면 지면보기

(대형 조선업체인) 코쿰스가 있던 내 어린 시절 말뫼였다면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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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탈시스템스 CEO 메하드 마쥬비.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지난 9일 스웨덴 말뫼의 창업지원센터 ‘미디어에볼루션’에서 만난 메하드 마주비(26) 오비탈시스템스 사장은 기자에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란 출신 스웨덴 이민 2세대인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와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일하다가 2010년 고향 말뫼로 돌아왔다. 우주선의 물 정화 시스템을 본뜬 새로운 정화 설비 업체를 창업하기 위해서였다.

| “죽은 나무 아무리 물 줘도 죽는다
코쿰스 망하고 나서야 깨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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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개 신생기업 직원들이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 뒤로 코쿰스의 옛 공장 외벽이 보인다.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그는 “새로운 말뫼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우수한 인재와 뛰어난 창업 기반시설, 국제공항과 가까운 입지까지 갖춘 ‘유럽의 실리콘밸리’”라고 말했다. ‘1인 기업’으로 시작한 오비탈시스템스는 20개국 출신의 엔지니어 50명이 근무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마주비 사장은 “썩은 나무는 베고, 새 나무를 심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며 “죽은 나무에 아무리 물을 줘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걸 정부 관계자들은 코쿰스가 망하고 나서야 깨우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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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장소의 50년 전 풍경. 1960년대 조선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코쿰스 건물 앞에 배가 들어와 있다. [사진 말뫼시]


마주비 사장의 회사가 입주한 미디어에볼루션은 몰락한 코쿰스 조선소 도크(dock)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아직도 쇠락한 코쿰스 건물 일부가 남아 있고, 폐허 앞 도크엔 물이끼가 잔뜩 껴 있다. 몰락한 조선소의 폐허에 들어선 신생 기업 수는 200여 개다. 과거에 배가 드나들던 공간에 지난 9일엔 스타트업 직원 100여 명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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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건물 외벽엔 코쿰스 기계작업장이라는 로고가 선명히 남아있다.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말뫼시는 2002년 코쿰스 크레인을 한국 울산에 매각한 직후 코쿰스 공장을 매입했다. 낡은 외벽과 골조만 남긴 채 내부는 최신식으로 개조해 2004년 창업지원센터를 열었다. 초창기엔 시가 100% 지원했지만 현재는 운영비의 90%를 스타트업이 내는 회비로 충당할 만큼 건실해졌다.

이 센터에 입주한 웹디자인업체 ‘화이트스페이스’의 엔더스 벵엘린(34) 대표는 스웨덴 최고의 명문인 웁살라대 출신이다. 벵엘린 대표가 가까운 수도 스톡홀름을 두고 고향 웁살라와 650㎞나 떨어진 말뫼에서 창업한 것은 생활 환경 때문이다. 그는 “도시 곳곳에 녹지공간이 풍부하고 주거 단지와 교육환경 역시 뛰어나서 두 자녀를 키우며 살기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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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뫼시는 코쿰스 공장 내부를 전면 수리해 2004년 창업지원센터로 개소했다. 200개 스타트업에서 6000여 일자리가 생겼다.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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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에 100% 말뫼시의 자금 지원으로 운영되던 미디어에볼루션(창업지원센터)은 이제 운영 경비의 90%를 스타트업이 내는 회비로 충당한다.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얀 학 말뫼시 도시발전전략국장은 “제조업의 위기로 도시의 생존 자체를 위협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며 “기업 하기 좋은 환경만큼이나 좋은 학교·극장·공원과 같은 문화 기반시설을 짓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일자리와 인프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말뫼는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꼽은 가장 혁신적인 도시 4위에 올랐다. 학 국장은 “1960년대엔 인구의 5%만이 다른 국가 출신이었지만 오늘날엔 33%에 달한다”며 “193개국 출신 이민자 10만 명이 만들어낸 문화적 다양성이 혁신을 이끌고 있다”고 강조했다.

| 창업 인큐베이터 ‘밍크’ 기적 이끌어
OECD 선정 최고 혁신도시 4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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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인큐베이터인 밍크(MINK)도 옛 조선소 지역에 자리잡았다.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스타트업을 성장시킨 또 다른 원동력은 말뫼시가 크레인을 한국에 판 2002년 세운 창업 인큐베이터 ‘밍크’다. 모르텐 웨브릭 밍크 대표는 “스타트업을 키우는 것은 도시를 성장시키는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Slowly but surely) 방법”이라며 “밍크에 입주한 70%가 창업에 성공하고 그중 20%는 큰 성과를 거둔다”고 말했다.

밍크는 시 예산 50%와 정부·기업 펀딩 50%로 운영된다. 한번 인큐베이터에 들어오면 2~3년 동안 머물 수 있다. 첫 6개월은 무료고, 이후 한 달 3000크로나(약 42만원)만 내면 된다. 입주 기업 업종은 말뫼시가 성장 동력으로 삼는 클린테크(친환경·신재생에너지) 분야와 교육·정보기술(IT) 관련 기업이 주를 이룬다. 페아 안더슨 말뫼시 무역산업국장은 “현재 인구의 절반가량인 16만3000여 명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에 종사한다”며 “조선소 하나로 연명하던 과거와 대조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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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가장 늙은 도시서 최연소 도시로…전통 산업만 고집했다면 불가능”
③ 13년 전 눈물이 웃음으로···말뫼의 터닝


| 변화 거부한 미국 철강도시 게리
인구 18만→8만, 1달러 집 매물도


안더슨 국장은 “60년대 말뫼와 비슷한 경제 규모였던 미국 인디애나주의 철강 도시 게리의 현재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60년 18만 명이던 게리의 인구는 현재 8만 명으로 줄었다. 최근엔 단돈 1달러짜리 집이 나올 정도다. 안더슨 국장은 “위기 때 용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말뫼도 게리처럼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말뫼(스웨덴)=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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