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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원폭의 고통에도…피해자 인정 못 받은 7600명

중앙일보 2016.05.26 01:36 종합 15면 지면보기
24일 오후 경남 합천군 합천읍 종합사회복지관 3층.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이하 협회) 합천지부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쪽 벽에 액자에 담긴 10여 장의 사진이 보였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廣島)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모습이다. 한 사진은 숯처럼 검게 탄 남성이었는데, 입에는 피우던 담배가 그대로 물려 있다. 두 팔에 화상을 입고 얼굴에 반점이 돋아 있는 사진도 있었다.

2세대 원폭 피해자인 한정순씨
관절 희귀병에 아이도 뇌성마비
3세 피해자는 현황 파악도 안돼
한국피해자 협회 오늘 일본 방문
히로시마 찾는 오바마 사죄 요구

심진태(75) 지부장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합천시장에 나가면 저런 사진 속 모습의 원폭 피해자를 쉽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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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2층 거실에서 원폭 피해 1세대인 한 할머니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자녀들에게 피부병이 자주 생겨 원폭 피해가 대물림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합천=송봉근 기자]


합천 원폭 피해자들은 대부분 일본 히로시마로 강제징용 간 사람들이다.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그나마 일군 재산을 다 잃고 겨우 목숨만 구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반겨 주는 사람은 없었다. 김도식(81·원폭피해자복지회관 거주)씨는 “화상 입고 거지꼴로 시장에서 구걸을 하니 당시 사람들이 우리를 ‘귀환동포’가 아니라 ‘우환(憂患)동포’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원폭이 투하된 지 벌써 71년이 흘렀지만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원폭 1세대는 자신의 병명도 모르고 세상을 떠났다. 2월 기준 원폭 1세대 생존자는 전국적으로 2570명이다. 이 중에서 합천에 가장 많은 625명이 산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 거주 한국인의 60~70%가 합천 출신이라 피해자가 많다.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이유다.

1996년에 한·일 양국 정부의 지원으로 원폭 피해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합천에 생긴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회관에는 현재 103명(정원 110명)이 생활하고 있다. 복지회관 뒤쪽에는 원폭 피해자 1055명의 위패를 모신 위령각이 있다.

기자가 찾은 24일 70~80대인 이들은 대부분 거실의 빈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방과 거실을 천천히 걸어다녔다. 그러나 피폭 당시 상황은 생생히 기억했다. 이수용(88) 할머니는 “아침에 막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쾅 하는 폭발 소리가 들린 뒤 정신을 잃었어. 눈을 떠보니 피투성이가 된 몸에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어.” 이 할머니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각종 병에 시달렸지만 그게 원폭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2002년부터 원폭 2세· 3세 피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됐다. 자신을 원폭 피해자 2세라고 밝힌 고 김형률(1970~2005년)씨를 통해서다. 그해 원폭 피해 2세 환우회(회원 1300명)도 만들어졌다.

환우회 명예회장인 한정순(57)씨는 “회원들은 본인이나 자식들이 지적장애·갑상샘·다운증후군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아무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씨 부모는 합천이 고향으로 히로시마에서 피폭됐다. 한씨는 30대에 관절이 괴사되는 희귀병으로 판명돼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24세에 결혼해 낳은 아들은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다. 정부는 원폭 2세 피해자를 76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3세 피해자는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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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 대표단은 26일 서울 미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일본으로 간다. 27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할 때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실태를 알리고 사과를 받기 위해서다.

심진태 지부장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강제징용과 피폭이라는 이중의 피해를 보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찾아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합천=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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